탈리타
쿰
“탈리타 쿰!” 소녀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
오늘 복음에서 죽은 듯이 잠자던 소녀 아니, 잠자듯 죽은 소녀에 게 예수님이 외치신 말씀입니다. 오늘의 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코린토 교회를 향하여 소중한 말씀을
남기십니다. “지금 이 시간 에 여러분이 누리는 풍요가 그들의 궁핍을 채워 주어, 나중에는 그들의 풍요가 여러분의 궁핍을 채워 준다면 균형을 이루게 됩니다.”
풍요로울 때 나누고 궁핍할 때 받자는 이론을 쉽게 말하면 ‘사랑‘ 이겠지요. 또 본당신부가 사랑에 대해 잔소리 하는구나 싶으시겠지만, 오늘 복음의 말씀과 연결해 보면
그저 단순한 사랑의 소식이 아니지 싶습니다. 이번 주의 복음은 아주 깁니다. 해서 짧은 독서로 선택을 해서 하혈하는 여인의 소식은 듣지 못하시겠지만 여러분 스스로
읽으실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래도 행여 읽지 못하시는 분들을 위해 간략하게 간추려보면, 주님께서는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죽음에서 건져 주시고 숱한 고생을 하며
열 두 해 동안 하혈하던 여인을 고쳐주십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12살 먹은 소녀에게 “탈리타 쿰!”‘소녀야, 일어나라!’ 12년간 하혈하던 여인 에게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딸이 죽었다는 소식을 접한 회당장에게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여라.”
치유를 받은 12살 먹은 야이로의 딸과 12년간 하혈한 여인은 불완전하고 결핍된 존재인 우리들의 모습일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이렇게 불완전한 세상에서 눈물, 슬픔, 고통, 그리고 울부짖음으로 살아가지만, 하느님의 사랑을 믿는 신앙으로 일어서(탈리타 쿰) 함께 가야 하는 여정임을
오늘 복음은 말하고 있습니다.
학교에 다닐 적에 오늘 복음에서의 열둘이라는 숫자에 대해 교수 님께 그 의미를 여쭈었지만 별 말씀이 없으셨는데, 오늘 다시 읽어보니 제게 큰 의미로 다가옵니다.
딸의 나이가 열 두 살이고 여인의 하혈한 기간이 열 두 해라는 점과 우리 교회를 상징하는 열 두 제자를 기억해 낸다면 이제 교회 공동체 구성원인 우리 모두가 세상을
향하여 “탈리타 쿰!”을 외쳐야 하는 것이 아닐까 싶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이 창조하시고 다스리시는 질서는 오묘합니다. 대자연 안에서 하느님의 모상대로 창조된 인간이 동·식물과 어울려 살아갑니다. 그런데
이세상은
천재보다
인재가
더
많이
발생하는데
그
이유는
우리가
잘
알고
있듯
하느님
중심의
삶을
무시하며
인간중
심의
탐욕과
이기주의가
판치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를테면
환경을
고려하지
않는
무분별한
개발로
생태계를
파괴함으로
자연에서
멀어진
인류는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는 법을 잊었고 그 댓가로 이름 모를 병으로 죽어가고
잊을 만하면 찾아오는 대재앙에 두려워합니다. 지금도 지구 온난화 현상이 현실화 되면서 빠른 속도로 빙하가 녹아내리고 있어 작은 섬나라들은 물에 잠길까
걱정하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대자연과의 조화, 생명있는 것들 과의 더불어 살아가는 것은 우리의 기본질서일진대 정복이니 하며 자연을 싸워 이길 대상으로 생각하며
기본질서를 지키지 못하니 힘들어지는 것은 우리 자신이 아니겠습니까? 가정의 문제도 심각합니다. 노인의 문제, 이혼, 낙태, 이기주의에 의한 가정파괴……..
더불어 살지 못하고 탐욕과 이기주의 그리고 정복의 대상이 되어진 우리의 이웃은 사랑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뛰어 넘어야 할 경쟁 상대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우리가 머무는 곳에서 먼저 탈리타 쿰을 외쳐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일상생활 안에서도 탈리타 쿰을 외침으로 나의 지나친 편리함 때문에
고통 받는 이웃과 자연과 생명이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오하이오 주에서 경관을 총으로 쏴 죽인 사건을 잘 아실 것입니 다. 희생자가 바로 우리 신자의 조카였습니다. 자살하려는 사람을 도우려 나섰다가 어처구나 없게 세상을
떠난 서니 킴을 기억 합니다. 지난 주일에 야윈 모습으로 성당에서 미사를 참석하신 전 안젤라 자매도 기억합니다. 그저 우리의 일이 아니니 다행이라는 생각이 아니라
슬픔에 잠겨있는 그들을 위해 우리가 해야 할 일을 찾는 것 아파하는 이들을 위해 우리가 해야 할 일을 찾 아내는 것은 세상을 향해 외치는 ‘탈리타 쿰!”이 아닐까 싶습니다.
우리의 눈물로 부르짖는 울부짖음이 하느님의 자비를 드러 내실 것을 믿으며 오늘 회장당에게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가슴에 새겨야 합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여라.”
교황주일이기도 한 오늘, 베네딕토 16세 교황님의 첫 번째 회칙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Deus
Caritas Est)를 기억해 봅시다.
육체와 영혼이 온전히 결합되어 인격이 형성되듯 에로스(인간 적인)사랑과 아가페(하느님의 조건 없는)사랑이 만나면 까리 따스(행동이 뒤따르는 사랑)를 이룰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랑은 말뿐만 아니라 행동을 통해서 드러납니다.
또한 사랑은 단순한 권고가 아니라 신앙인의 의무입니다.
우리는 사랑으로써 신앙인의 정체성을 확신하며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갖습니다. 하느님을 믿는이 공동체가 가슴 따뜻한 사람들로 이루어진 사랑의 공동체이기를 기도하며
우리의 몸과 마음과 영혼을 행동하는 믿음의 길로 나서야 합니다. 사막의 성 자 샤를르 드 푸고는 이렇게 말합니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사 람은 그 사람을 닮게 됩니다.”
우리의 모습에서 탈리타 쿰을 외치신 그분의 모습을 볼 수 있을 까요? 아니 우리 자신에게 먼저 ‘탈리타 쿰!’을 외쳐야 하는 것 이 아닐까요?
형제자매 여러분, 일어서십시오!
탈리타 쿰!!!
– Fr. 김 두진(바오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