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순교자 대 축일을 지내며
이번 주일은 연중 제 25주일 이지만, 한국 순교자 축일 경축 이동으로 김대건 안드레아와 정하상 바오로와 그의 동료 순교자들의 축일로 지냅니다.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를 버리고 매일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자기 자신을 잃거나 해치게 되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럽게 여기면, 사람의 아들도 자기의 영광과 아버지와 거룩한 천사들의 영광에 싸여 올 때에 그를 부끄럽게 여길 것이다.” (루카 복음 9장 23-26)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기 힘듭니다. 오늘 말씀에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 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하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내가 가지고 있는 십자가는 달랑 목에 걸려있는 작은 목걸이와 주머니 속 묵주에 달려있는 조그만 십자가 뿐인데,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따르는” 수행은 가능할까요?
모든 사람의 인생에는 선택의 여지없이 질 수밖에 없는 삶의 십자가가 있기 마련입니다.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기껍게 고통을 인내하며 견디는 것입니다. 십자가 자체는 모든이에게 고통일 뿐이지만,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는 가에 따라 인생의 장애가 되기도 하고 성공의 발판이 되기도 합니다. 또한 십자가는 거부한다고 없어지는 것이 아니며 인간 실존에 따르는 필연적인 것이기에 극복할 수밖에 없는 과제입니다. 그러나 십자가를 받아들여 묵묵히 지고 갈 때 십자가는 참된 삶의 의미를 깨우쳐주는 도구로서 영원한 생명에 이르게 하는 징검다리가 됩니다. 따라서 제자로서의 삶은 “그분의 가 르침을 밤낮으로 되새기며”(시편 1,2) 날마다 주어지는 자신의 십자가를 봉헌하는 일상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은 나름대로 자기의 십자가가 있습니다. 각 사람의 개성이 다르고 재능이 다르고 살아온 환경이 다르듯이 각자의 십자가는 크기도 모양도 무게도 모두 다릅니다. 사람은 어차피 고통을 겪으며 살아가는데, 문제는 그 고통과 고생이 의미 있는 것인가 아닌가 입니다. 공부하는 것도 고생이고, 직장 생활도 고통의 연속입니다. 개인 사업을 한다해도 고통이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한 가지 문제가 해결되면 또 다른 문제가 생깁니다. 그래서 누구나 자기 십자가가 가장 무겁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자기 십자가를 지라는 말씀은 예수님께서 남을 위해 십자가를 지신 것처럼 예수님의 제자라면 남을 위한 희생, 남을 살리기 위한 죽음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십자가를 참고 져야만 합니다. 피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북경에서 이승훈이 세례를 받고 귀국한 것이 1784년입니다. 그 이듬해인 1785년부터 시작된 박해는 188년 조선 조정이 미국과 수호조약을 맺기까지 약 백 년 동안 지속되었습니다. 특이한 점은 한국인들 스스로 중국으로 부터 신앙을 가져 왔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가톨릭교회 선교 역사에 처음 있는 일입니다. 그러나 신앙이 한국 땅에 들어와서 뿌리도 내리기 전에 박해는 시작되었습니다.
천주교 관계 한문서적들, 마태오 리치의 천주실의를 비롯한 한문으로 된 몇 권의 서적이 우리나라에 들어온 것은 17세 기 초였습니다. 이승훈이 세례를 받기 약 150년 전의 일입니다. 즉 신자가 되기 전부터 우리 조상들은 천주학을 공부하며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사람들은 그것을 서학이라 했고, 그 문서들을 영입하여 연구한 사람들은 실학파라 불리던 유교 학자들이었습니다. 실학파학자들은 합리적이며 현실성 있는 학문과 사회 제도를 공부했습니다. 그 시대의 법은 당시에 자행되던 부정부패와 약자에 대한 횡포를 방관할 뿐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조장하였습니다. 무자비한 법과 제도에 한 마디 항의도 못하며, 짓눌려 살다, 죽어가는 사람들에게 하느님으로 말미암은 질서, 곧 정의와 자비와 사랑에 대한 가르침은 그 시대 사회가 안고 있던 모든 부조리를 한 순간에 걷어 내는 기적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야말로 ‘새 하늘과 새 땅’ 을 열어주는 일 이었습니다.
한 예를 들자면, 순교자 중 백정 출신인 황일광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가 남긴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나에게는 천당이 둘 있다. 하나는 죽어서 가는 천당이고 또 하나는 양반과 쌍것을 가리지 않고, 모두를 똑같이 존중하는 이 세상의 천당이다.” 백정출신으로 멸시당하며 살던 사람이 신앙인이 되어 계급의 장벽 없이, 모두가 형제자매로 통하는 신앙공동체는 그에겐 천당이었을 겁니다. 순교자들은 하느님으로 말미암아 열리는 새로운 세상과 새로운 질서를 열망하였고, ‘새 하늘과 새 땅’을 위해 그들의 목숨을 바쳤습니다. 사도 바오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 세상의 그 무엇도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갈라놓을 수 없습니다.” (로마 8,39) 순교자들은 하느님의 사랑을 믿었습니다. 그들은 믿음을 버리지 못하여 모진 형벌을 감수하고 생명을 잃으면서도 그 사랑을 열망하였습니다. 그분들은 죽음을 넘어 하느님을 향해 떠났습니다.
십자가를 지기 위해 자기를 버리는 것은 우리 순교자의 후예 라면 당연히 살아야 하는 삶의 참된 지혜입니다.
– 김두진 바오로 신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