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1일 주님 승천 대 축일
군대에 입대해서 훈련을 마치고 처음 부대에 배치되면 신고식을 한다. 혹독한 신고식을 마치고 나서 고참병이 묻는다. "야 너 언제 제대하니?" "00년이요." 고참병이 웃으며 말한다. "그 해가 올 것 같긴 하니?" 당시엔 그 해는 끝끝내 올 것 같지 않았다. 오래 전에 친구의 사제 서품 25주년 미사에 참석한 적이 있다. 그 친구 신부가 고참병이 묻는 질문처럼 내게 물었다. "2025년이 올 것 같니, ㅋㅋㅋ” 그런데 왔다. 그 2025년이…"
부끄러운 것은 나이가 들었다는 것뿐만이 아니다. 이곳에서 12년을 여러분들과 함께 살면서도 부끄러운 것들이 많다. 급한 성격에 말도 듣기 전에 대답하고, 뚱한 표정으로 소리치고, 조리 있게 설명한다고 노력해도 목소리가 큰 덕분에 오해도 생기고,…. 부끄럽다. 숨고 싶다. 그런데 오늘 25주년이란다. 좀 더 잘 했으면, 좀 더 노력했으면, 좀 더 거룩했으면,…. 그러니 부끄럽다. 그리고 미안하다.
92년에 미국에 왔다. 일 년 동안은 영어 공부하겠다고 한국사람 안 만나겠다고 다짐을 했으니 93년부터 시카고 순교자 성당과 인연을 쌓았다. 삼 십대 후반의 청년이 청바지에 기타를 둘러메고 성당에 등장했으니 웃길 만도 하다. 그 때 만났던 청년들이 이제는 벌써 60대가 다 되어버린 노년이 되었다. 지금은 교황님을 배출한 학교가 되었지만, South 시카고에 있는 학교에서 공부 한다고 밤거리를 조심해야 하라 시던 어르신들, 공부가 쉽지 않았지만, 틈틈이 여러분들의 사랑을 많이 받았다. 김치 못 먹으면 공부 못한다고 김치를 싸 주시던 분, 라면만 먹으면 병 난다고 쌀 사들고 와 주신 분, 한국 음식 먹어야 한다고 공동체에 와서 갈비찜을 해 주시던 분,
뭐 라도 먹고 싶으면 연락하라며 꼬깃한 돈을 손에 쥐어 주신 분, 많은 이들의 걱정 속에 가난한 과부의 뒤주에 밀가루와 기름병이 바닥이 나지 않은 것처럼 우리 수도원 냉장고에 김치와 김이 늘 넘쳐났고 ……..
다시는 오지 않겠다고 다짐했지만, 98년에 다시 왔다. 사제의 부르심에 어리둥절하며 다시 공부해야 하는 어려움이 걱정되었지만, 격려와 사랑은 배가 되었다. 빛나는 졸업장을 두 번째 받고, Millennium Baby로 사제 서품을 받던 2000년 6월 3일, 시카고 성당에서 별로 멀지도 않은데 관광버스에 많은 분들이 서품식에 와 주셨다. 사물놀이들이 시끄럽게 꽹과리에 징에 북 치고 장구 치고 난리 법석을 만들던 날, 주례를 맡았던 Edwin Conway 주교님도, 미국사람들도 나도, 형님 내외도 모두 놀랐다. "전능하신 분께서 나에게 큰일을 하셨기 때문 입니다."
2000년 6월 11일 성령강림 주일에 시카고 한국 순교자 성당에서 첫 미사를 드릴 때 수련장이셨던 Dick Thomson 신부님 강론에서 "당신은 서품 받을 때 엎드려 무슨 기도를 했느냐"는 질문에 "겸손한 신부가 되게 해 달라고…." 했는데, 미국 사람인 그가 이런 말을 했다. "지나가는 개가 웃겠다. 당신이 겸손한 신부라고? 그건 하느님도 그렇게 못하신다고……." 핀잔 아닌 격려로 들으면서도 다짐을 했는데, 결국은 하느님도 나를 그렇게 못 만드셨고, 나도 겸손한 사제는 못되었다. 그러니 이 얼마나 미안하고 부끄럽고 감사한 일인가?
우여곡절 끝에 2014년 1월 1일 부터 이곳 본당의 부임신부로 임명되고 뜻 밖에도 우리 성당이 본당(Parish) 도 아닌 Mission 혹은 Center임에도 John Manz 주교님으로 부터 본당 착좌식을 하게 되었고, 이곳에 부끄러운 발을 내딛게 되었다. 부임하자마자 첫 번째 일이 To Teach Who Christ라는 교구 Fund Rising이라는 큰일에 배낭 매고 신자들을 찾아다니며 구걸하는 신부가 되었고, 곧이어 Renew My Church라는 교회 통폐합의 일이었기에 신자들로 부터 많은 오해와 갈등이 있었다. 처음의 5년은 정말 지옥 같은 시간이었지만, 이 또한 전능하신 분께서 나에게 큰일을 하셨기 때문이었으니, 어찌 부끄럽고, 미안하고, 감사하지 않을 수 있으랴?
올 것 같지 않았던 25년이 왔는데, 돌이켜 보면 그저 부끄럽고, 미안하고 감사하다. 그러니 이 어찌 "전능하신 분께서 나에게 큰일을 하셨기 때문"이라 고백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여러분 모두에게 미안하고 부끄럽고 감사한 마음이 가득한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