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31일 연중 제 22 주일
"예수님께서는 초대받은 이들이 서로 윗자리에 앉으려는 모습을 바라보시며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누가 너를 혼인 잔치에 초대하거든 끝자리에 앉아라." 끝자리에 앉는 이유가 앞자리로 올라가기 위해서라면 그것도 웃기는 이야기다. 만약에 윗자리로 올라가려고 끝자리에 앉았는데 주인이 아무 소리 안하고 계속 거기에 앉아 있으라 한다면 얼마나 웃기는 상황이 될까?
일반적으로 잔치나 행사에 초대될 때 앞자리 혹은 윗자리에 배정된다는 것은 초대한 사람이 초대된 이의 존재와 권위를 높이 인정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런 통념을 거부하시고 “누가 너를 혼인 잔치에 초대하거든 윗자리에 앉지 마라… 끝자리에 앉아라.”(루카 14,8-10)고 하신다. 이는 높은 자리에 대한 부정적 생각을 말하시는 것도 아니고 윗자리에 앉으려는 마음이 잘못되었다고 꼬집으시려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단순하게 어떻게 하면 진정으로 윗자리에 앉게 되는지를 알려주시는 것이다. 예수님이 가르치신 방법은 이렇다. “초대를 받거든 끝자리에 가서 앉아라. 그러면 너를 초대한 이가 너에게 와서 ‘여보게, 더 앞자리로 올라앉게’ 할 것이다. 그때에 너는 함께 앉아 있는 모든 사람 앞에서 영광스럽게 될 것이다.”(10)
이런 예수님의 가르침에는 세상의 처세술과 구별되는 원칙이 내포되어 있는데, 영광과 영예는 하느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것이지 우리 스스로 마련하고 획득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너를 초대한 이”가 “더 앞자리로 올라앉게”라고 말한다고 강조하신다. 또 한 가지 구별되는 원칙은 하느님의 축복은 그 은총을 되갚을 능력이 없는 이들에게 더욱 내려진다는 것이다. “가난한 이들, 장애인들, 다리 저는 이들, 눈먼 이들을 초대하여라. 그들이 너에게 보답할 수 없기 때문에 너는 행복할 것이다.”(13-14)
사무엘기 하권 5,8은 “다리 저는 이와 눈먼 이는 궁 안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명시하고 있고, 다리 저는 이와 눈먼 이, 듣지 못하는 이는 공동체의 일원이 될 수 없었다. 복음은 이러한 통념을 단번에 뒤집어 놓는다. 이유는 그들이 보답할 길이 없는 이들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보답할 능력이 없을 정도로 가난한 이들은 그 누구에게도 의존할 수 없기에 스스로 존재를 증명해야 하는 이들이므로, 자기 삶의 주인공이다. 온전히 주인공이 된 그들은 하늘나라의 잔치에서도 당연히 가장 우선적으로 초대되는 주인공이 될 것이다.
이런 가르침은 제1독서에도 그대로 반영된다. “네가 높아질수록 자신을 더욱 낮추어라. 그러면 주님 앞에서 총애를 받으리라.”(집회 3,18) 이 문장을 통해 집회서의 저자는 온유와 겸손, 자선을 이웃에 대해 가져야 할 기본적 자세로 강조한다. 특별히 본문은 선물로 타인의 환심을 살 수 없는 이들에게 “네 일을 온유하게 처리하여라. 그러면 선물하는 사람보다 네가 더 사랑을 받으리라.”(17)고 하는데 “온유하게 처리”하는 것이 선물을 주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이기 때문이다.
제2독서는 우리 안에 있는 고유한 존엄과 품격을 선언하고, 이로써 왜 그리스도인들이 세속적 명예나 영광에 연연하지 않아도 되는지를 설명해준다. “여러분이 나아간 곳은 시온산이고 살아 계신 하느님의 도성이며 천상 예루살렘으로… 하늘에 등록된 맏아들들의 모임이 이루어지는 곳입니다.”(히브 12,22-23)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천상의 맏아들이 된 이들이기에 세속적인 처세나 성공에 목맬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가난과 착취, 모욕과 무시가 일상이 된 삶이라 해도, 자기 존재만은 누구도 빼앗아 갈 수 없는 실재이기에 온전히 자신에게 집중하며 당당하게 살아가는 이들이 있다. 반대로 속물적 불안과 비겁한 조바심, 구차함이 일상이 되어 아무리 지체 높은 자리에 앉아 있다 하더라도, 매 순간 자신을 남과 비교하느라 정작 자율적이고 주체적인 삶은 잃어버린 채 사는 사람도 있다.
점심이나 저녁식사를 베풀 때 너에게 보답하는 사람보다는 오히려 보답할 수 없는 사람들을 초대하라고 하신다. 즉 사랑은 이해득실을 계산하지 말고 베풀어야 한다는 말씀이다. 이쯤 되면 왜 예수님께서 높은 자리에 연연하지 말라고 하셨는지 이해가 된다. 그 잔치에 초대받은 사람들은 이해득실의 관계로 와 자기가 어디에 앉아야 하는지 이미 생각하고 있었다. 사랑은 이해관계가 아니다. "내가 너에게 해 준 것이 얼마인데, 내가 해 준 것의 반이라도 해 주어야지," 나의 사랑이 보답을 바라는 사랑이면 슬픔으로 변한다.
아무리 조용하게 끝자리에 머물러 있어도, 최상층의 자리에 있는 이들이 부질없는 권력과 공허한 허세에 빠져 있다면 역사는 누가 선택된 자들인지를 분명히 식별해 낸다. 이것이 역사가 감당해온 직무이며 좀 더 정확히 말한다면 역사의 주인이신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이다. 진정한 투쟁과 개혁은 맹렬한 분노로 핏발선 눈을 부릅뜨며 이룩하는 것이 아니라, 낮은 곳에서 서로를 보듬는 열망과 사랑으로 이루어지는 신비다. 그것이 기쁜 소식 곧 복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