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4월 소 공동체 자료
(주제 복음 및 소 공동체 자료와 “매일 성경읽기”표는 개인이 보관하시기 바랍니다.)
주제 복음 : 구역, 반 모임 주간에 따라 복음 선택 가능합니다.
부활 제2주일 요한 20,19-31
부활 제3주일 요한 21,1-19
부활 제4주일 요한 10,27-30
부활 제5주일 요한 13,31-33ㄱ.34-35
시작, 마침성가 : 128번 또는 부활시기 성가 중에서 선택 하십시오.
부활 제2주일·요한 20,19-31 의심을 딛고 일어선 믿음
연한 초록이 담 아래 수줍은 듯 흘러내리고 연분홍의 꽃망울이 잔뜩 움츠려 만개를 기다립니다. 봄을 기다린 마음이야 이미 벌써 이지만 쉬이 봄을 맞이하지 못한 마음이 조금 지쳐가기도 합니다. 그래서일까봄의 화사함을 기다리며 맞이한 예수님 부활도 그 기쁨이 약간 반감되는 느낌입니다. 그 옛날 빈 무덤을 목격하고도 예수님 부활에 미온적이었던 제자들처럼 말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 소식을 접한 제자들의 첫 반응은 놀랍게도 ‘의심’이었습니다. 여인들이 예수님의 빈 무덤을 사도들에게 전했지만 그들은 믿지 않았습니다. 그런 제자들 중 하나였던 토마스 사도에게 드디어 부활하신 예수님이 나타나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 하고 말씀하십니다. 그때에 이르러서야 토마스는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이라고 고백합니다. 이 고백은 요한복음서의 첫 고백과 같은 것으로 ‘한 처음부터 하느님과 함께 한 하느님’이라는 뜻입니다. 의심의 대명사였던 토마스 사도의 입에서 예수님의 신성이 처음으로 고백됨이 절묘해 보이기도 합니다. 이처럼 믿지 않고 의심했던 이에게조차 예수님의 부활은 명확한 사실이었고, 더불어 그의 입을 빌려 이제 예수님은 신적인 존재임이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때로는 맹목적인 믿음보다 의심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것은 믿지 못해서가 아니라, 내 믿음을 모래 위가 아닌 반석 위에 올려놓기 위해서 말입니다. 흔들리지 않는 믿음보다 숫한 흔들림 끝에 쌓여진 믿음이 더 확실해 보이는 이유입니다. 해서 토마스 사도의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이라는 고백이 예수님 신성에 무거움을 더해 주는지 모릅니다. 예수님 부활에 대한 우리의 신앙은 맹목적인 믿음이 아니라 의심을 딛고 일어선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부활 제3주일·요한 21,1-19 사랑은 현재 진행형
사랑을 한 때의 경험처럼 말하는 것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언제나 현재 진행형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사랑도 자라나는 생명과 같아 끊임없이 성장한다는 것에는 동의합니다. 그런 이유로 사랑은 성취해야 할 것이 아니라 생명이 다하는 그날까지 배워 익혀야 하는 것인
지 모릅니다. 오늘 복음 속에서 부활 후 세 번째로 나타나신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물으십니다. 한 번이 아닌 세 번씩이나 같은 질문을 반복하신 예수님의 의도는 너무나 분명해 보입니다. 바로 베드로가 당신을 부정했던 횟수를 상기시키는 것이고, 동시에 사랑은 횟수가 아니라 영원 속에 자리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해서 예수님의 세 번에 걸친 사랑에 대한 물음은 베드로로 하여금 당신 사랑은 과거 어떤 순간에 끝난 완료형이 아니라 영원한 현재 진행형 속에 자리한다는 것을 일깨우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분명 예수님 사랑은 보상을 바라지 않는 사랑입니다. 사랑은 받는 것에만 머물면 오늘을 살게 할 뿐이지만, 그것을 행하는 기쁨 속에 자리하면 영원을 살게 하는 신비입니다. 사랑 받는 것에만 머물면 초라함으로 자리할 수밖에 없지만, 사랑하는 것 속에 자리하면 그 어떤 것으로도 가릴 수 없는 빛이 됩니다. 예수님 부활은 그래서 사랑을 통해내 안의 신성을 흔들어 깨우라는 분명한 징표입니다. ‘때로는 누군가 닦아줄 사람만 있다면 눈물도 사랑의 변주곡일 수 있다’는 말처럼, 삶이란 사랑하는 기쁨 속에 자리할 때 그 어떤 것도 감히 압도할 수 없습니다. 그 사랑이 비극적인 우리 삶의 현실을 희극적으로 변화시키는 가장 강력한 힘이기도 합니다.
부활 제4주일·요한 10,27-30 성소, 부르심
연이어 피어나는 꽃들처럼 하느님의 부르심에 순명하는 우리였으면 합니다. 오늘은 부활 제4주일이면서 성소 주일입니다. 분명 우리 신앙은 성직자의 가난이나 수도자의 순결을 믿는 종교가 아닙니다. 이 땅에 그 많은 성직자와 수도자들이 하나같이 허물없이 살아가기를 기도한다고 해도 결코 그런 일은 현실이 되지 못할 겁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믿음은 사람에 있지 않고 하느님께 두어야 한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될 뿐이니 말입니다. 그럼에도 이 땅에 성소가 많아지기를 기도하게 되는 까닭은 하느님 은총의 한 자락은 언제나 늘 누군가를 통해 지상에 펼쳐지기 때문입니다. 돌이켜 보면 지난 사제 생활은 제 자신의 부족함으로 인해 온탕과 냉탕을 오가는 일이었습니다. 미움이란 묘해서 마음속으로 들어오기는 쉬워도 한번 터를 잡으면 질기기는 고래 힘줄보다 더하고 더디기는 굼벵이 저리 가라 일 정도이니 떨쳐 버리는 일이 쉽지만은 않았습니다. 파고드는 미움은 어쩔 수 없다고 해도 미움으로 마침표를 찍을 수는 없는 일이기에 기도도 해보고 명상도 해 보지만 뜻대로 되지 않을 때가 많았습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지난 잘못을 생각해 보는 것은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누군가를 이해할 수 없을 때 내 지난 하나의 잘못은 또 하나의 이해의 다리를 놓는 소중한 디딤돌이 되었습니다. 때로는 잘못조차 다른 이를 향한 이해의 디딤돌로 사용하시는 하느님의 섭리가 참으로 신비롭고, 그 잘못조차 하느님 은총의 섭리 속에 자리할 수 있다는 것에 새삼 놀라기도 했습니다. 해서 부족하고 믿음이 얕다 말하는 이들에게 그 부족함이 참된 부르심이라고 감히 말해 주고 싶습니다. 성소란 능력이나 완성품에 대한 선택이 아니라 하느님과 함께 하는 여정 속에 선택되는 동반자로서의 행복이니까 말입니다.
부활 제5주일·요한 13,31-33ㄱ.34-35 서로 사랑 하여라
누군가의 말처럼 사랑을 계산하면서부터 사랑을 잃어버린 시대입니다. 삶은 사랑이라는 말이 넘쳐나지만 마치 생화와 같은 조화에 감탄하며 살아가는 느낌을 받습니다. 그래서일까 목마름보다 사랑의 갈증이 더 심한 오늘이기도 합니다. 오늘 예수님은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하고 말씀하십니다. 사랑은 저절로 주어지는 당연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 말씀 이면에는 서로를 사랑하지 않는 참혹한 현실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성당에서 봉사하는 분들조차 때로는 사랑보다 미움을 간직하는 경우를 보면 더더욱 그렇습니다. 이웃은 당연히 서로 사랑하는 존재가 아닙니다. 사랑하기 위해 무척 애를 써야 조금 사랑할 수 있는 존재입니다. 사랑도 따지고 보면 굉장히 애를 써야 조금 이룰 수 있는 가치이기에 의지적으로 노력해야 누릴 수 있는 덕입니다. 분명 예수님께서 사랑을 말씀하신 이유는 서로 사랑하지 않는 참혹한 현실에 기인합니다. 하지만 사랑 없이 살아갈 수 없는 인간의 조건 때문이기도 합니다. 사랑은 당연한 것은 아니지만 사랑 없이는 살아갈 수 없다는 것, 해서 사랑하려는 노력만큼은 멈추지 말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가끔씩 임종하는 분들의 마지막 모습을 봅니다. 전부는 아닐지 모르지만 임종 때가 되면 사랑 받지 못한 것보다 좀 더 사랑하지 못했음을 아쉬워합니다. 어쩌면 먼 훗날 하느님께서도 죄의 크기보다 얼마나 사랑을 행했는지를 물으실지 모릅니다. 굳이 지상이 천국보다 좋은 이유를 찾는다면 천국에는 내 사랑을 필요로 하는 이들이 없지만 지상에는 아직 내 사랑을 필요로 하는 이들이 많다는 사실입니다. 삶은 사랑을 먹고 자라고 그 사랑의 열매는 천국 열쇠를 만드는 소중한 재료가 되는 법이니 말입니다.
지난 2012년 12월에 “전능하신 천주 성부 천지의 창조를 믿나이다.”이어 사도신경 내용설명 및 묵상입니다. ‘신앙의 해’ 동안 이 묵상이 연재됩니다.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님을 믿나이다.
익튀스(ΙΧΘΥΣ), 그리스어로 ‘물고기’라는 뜻인데, 초기박해시대의 교우들은 자신이 신앙인임을 알리는 암호로 사용하였습니다. ‘예수(Ιησουζ), 그리스도(Χριστοζ), 하느님(Θεου), 아들(Υιοζ), 구세주(Σωτηρ)’의 첫 글자를 모으면 익튀스(ΙΧΘΥΣ)라는 단어가 되기 때문입니다. 즉 초기 교회공동체는 ‘예수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아들, 구세주’임을 고백하였던 것입니다.
교황 베네딕토 16세께서는 ‘신앙의 해’를 선포하시면서, 신앙인으로서 우리가 걸어가야 하는 길의 핵심을 ‘나자렛 사람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찾아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역사의 한 인물이었던 ‘예수’에 대해 어떠한 고백을 하느냐가 그리스도인 정체성의 원천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만이 예수님을 하느님의 외아들, 아버지 하느님과 같으신 분으로 고백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필리피 지방에서 제자들에게 “사람의 아들을 누구라고들 하느냐?”하고 물으시고, 이어서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라고 질문하십니다. 다른 사람들이 아니라, 나와 함께 살아가고 있는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믿느냐는 말씀입니다.
이 물음은 바로 우리에게도 주어진 물음입니다. 예수님의 ‘너는 나를 누구라고 믿느냐?’는 이 물음에 무엇이라고 답하시겠습니까? 사실 ‘예수’라는 이름은 구약이나 예수님 시대에는 일반적인 이름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야훼께서 구원하시다’는 의미의 히브리식 이름 ‘여호수아’를 그리스식으로 표기하면 ‘예수’입니다. 그런데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태어난 나자렛 출신의 예수, 그 예수를 우리는 우리의 구세주,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참 하느님이시며 동시에 참 인간’이십니다. 예수님은 아버지 하느님의 외아드님이시며, 이 세상에 오신 하느님이십니다. 아버지 하느님께서는 예수님께서 세례 받으실 때와 거룩한 변모 때에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라고 선포하셨습니다.(마태3,17; 17,5)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들’이시고, 하느님은 ‘아버지’로 선포됨으로써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요한10,30)라는 말씀이 드러납니다.
그러므로 이제 예수님을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입니다.(요한14,9) 그런데 ‘예수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라는 신앙을 고백하는 데에는 자신의 온 삶을 내어놓는 결단이 담겨야 합니다. 예수님의 생각, 느낌, 마음으로 드러난 그분의 삶을 온전히 받아들이고, 따르겠다는 결단이 수반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누구이십니까? 아버지 하느님의 사랑을 전하신 ‘사랑의 하느님’이십니다. 그 사랑 체험을 우리 각자의 삶에서 찾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사랑을 전할 수 있어야 합니다. 바로 거기에서 예수님께 대한 우리 각자의 신앙 고백이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우리가 고백하는 신앙은 신앙 선조들로부터 물려받은 신앙에 함께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우리의 신앙을 물려주어야 할 것입니다. 이처럼 신앙을 이어가는 여정 안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오늘도 묻고 계시는 주님께 우리는 온 마음으로 답할 수 있어야겠습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마태16,15-16)
♥안내 : ‘읽고 푸는 성경퀴즈’는 쉽니다. 4월부터는 매일 성경읽기를 합니다. – “매일 성경 읽기 표”를 배부하오니 성경을 매일 읽기 전 후 기도를 하시고 오늘 또는 매번 읽으신 것을 표시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