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5월 소 공동체 자료
(주제 복음 및 소 공동체 자료는 개인이 보관하시기 바랍니다.)
주제 복음 : 구역, 반 모임 주간에 따라 복음 선택 가능합니다.
부활 제6주일 요한 14,23-29
주님 승천 대축일 루카 24,46ㄴ-53
성령 강림 대축일 요한 20,19-23
삼위일체 대축일 요한 16,12-15
시작, 마침성가 : 250번 또는 성모님 성가 중에서 선택 하십시오.
부활 제6주일 요한 14,23-29
꽃이 진다고 하여 내가 자네를 잊겠는가?
5월, 꽃들이 한창입니다. 산에서 내려오면서 기념품을 파는 가게에서 다음의 글이 새겨진 기념품을 보았습니다. “꽃이 진다고 하여 내가 자네를 잊겠는가?”
오늘 복음은 최후만찬 석상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원초적 고별사’입니다. 특별히 고별사의 마지막 부분에 해당됩니다. “보호자,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께서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기억하게 해 주실 것이다.”(요한14,26)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남기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도, 겁을 내는 일도 없도록 하여라.”(요한14,27) 꽃이 질지라도 우리를 잊지 않으시려 성령과 평화를 약속하신 예수님의 사랑은 우리 마음에 영원토록 남겨지기에 몸을 바로 세워 봅니다. 시간이 가면 사라질 꽃의 취하지 말고 영원히 남겨질 성령과 평화를 간직하고자 사랑을 실천하는 우리가 마땅히 되어야겠지요.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킬 것이다.”(요한14,23)
묵상 : 나는 지금 바쁜 내 일상생활에 묻혀 주님을 잊어버리고 살고 있지 않나요?
주님 승천 대축일 루카 24,46ㄴ-53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
오늘은 예수님께서 지상생활을 마치고 아버지 곁으로 돌아가신 것을 기념하는 주님 승천 대축일입니다. 오늘 복음은 하늘에 오르시는 주님을 짧지만 의미심장한 말로 그려내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베타니아 근처까지 데리고 나가신 다음, 손을 드시어 강복하셨다. 이렇게 강복하시며 그들을 떠나 하늘로 올라가셨다.”(루카24,50-51)
어느 신부님께서 공군부대 사목 중에서의 이야기입니다. “전투기 조종사가 되기 위하여 조종학생들이 매일 연습하던 활주로, 바로 그곳에서 그들을 위해 기도하고 축복해주면 그들은 하늘로 올랐습니다. 강복하시고 하늘로 오르신 예수님과 사제의 축복을 받고 하늘로 오르던 조종사들. 상황과 역할이 바뀌었지만 하늘에 오른 이와 지상에 남은 이의 마음은 같았을 것입니다. 주어진 임무에 대한 충실함과 그 임무가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기도하였다는 사실.”
제자들에게 남겨진 임무는 ‘예수님의 부활과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가 그분의 이름으로 모든 민족들에게 선포되어야’(루카24,44-48 참조) 하는 것이고, 조종사들에게 남겨진 임무는 조국의 하늘을 지키는 일입니다. 또한 예수님은 이를 위해 기도하시며 하늘에 오르셨고 사제는 지상에 남아 조종사들을 위해 기도하였습니다. 이심전심(以心傳心)이라고 할까요? 그래서 주님 승천 대축일에 다음과 같이 기도합니다.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
묵상 :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오늘도 나는 최선을 다하고 있나요?
성령 강림 대축일 요한 20,19-23
성령을 보셨나요?
건강 때문에 걷기 시작하였습니다. 걸으면서 살도 빼고 기도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덤으로 바람을 보게 되는 선물도 받았습니다. 물론 바람 그 자체를 본 것은 아닙니다. 산책길 양옆에 우뚝 선 나뭇잎이 살랑대고 꽃잎이 흔들거릴 때 보았습니다. 게다가 살짝 땀이 흘러 젖어버린 살갗에 바람이 닿을 때는 내가 바람이 된 줄 알았습니다.
성령 강림 대축일입니다. 구약성경에서 성령은 ‘하느님의 얼’, ‘입김’또는 ‘바람’으로 표현됩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성령은 예수님의 숨결로 나타납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숨을 제자들에게 불어넣으시면서 “성령을 받아라.”(요한20,22) 하시지요. 그리고 성령은 죄의 용서로 보여집니다.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요한20,23) 우리는 성령을 바람처럼 그 자체로 볼 수 없습니다. 하지만 주님의 뜻대로 서로의 죄를 용서할 때 성령은 우리 안에서 보여 집니다. 따라서 우리가 주님 말씀처럼 누구의 죄든지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마태18,22) 한다면 성령은 우리를 하느님 곁에 영원히 머물게 하겠지요.
묵상 : 성령을 통해 신바람 나게 용서하는 이가 되도록 주님께 기도합시다!
삼위일체 대축일 요한 16,12-15
삼위일체의 신비, 사랑과 정!
몇 해 전 어느 회사 사보에 실린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완전한 사랑의 3대 원칙은 다음과 같다. 첫째는 예기치 않은 만남, 둘째는 미친 듯한 열정, 셋째는 불행한 결말이다. 또한 사랑에는 3·3·3법칙도 있다. 3번째 보고 좋아할 수 있으면 3달 안에 미친 듯이 사랑하고, 3년 안에는 반드시 식어버린다는 법칙이다. 누군가가 그랬다. 사랑은 실패하면 일기장에 남고 성공하면 호적에 남는다고. 하지만 결혼 15주년에 사랑은 부질없고 정(情)은 왜 이리 안 떨어지는지 모르겠습니다. 앞으로 25년, 50년이 흐른 뒤에도 서로를 영원히 사랑하는 건 바라지 않습니다. 그저 아프고 힘들 때 서로 기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삼위일체 대축일입니다. 삼위일체란 한 분 하느님 안에 계신 세 위(位)의 사랑을 말합니다. 즉 성부는 사랑 때문에 사람을 창조하셨고, 성자는 사랑 때문에 사람을 구원하셨고, 성령은 사랑 때문에 사람을 끊임없이 거룩하게 하심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사랑의 신비를 우리도 주어진 삶 속에서 살아가야지요. 당연히 생각과 말과 행동으로 내 곁의 사람을 사랑해야 합니다. 특별히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은 신앙인답게 삼위일체의 정(情)으로 끈끈하게 사랑합시다.
묵상 : 머리로 사랑하지 말고 마음 가득한 정(情)으로 가장 가까운 사람부터 사랑합시다!
지난달에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님을 믿나이다.” 이어 사도신경 묵상입니다.
성령으로 인하여 동정 마리아께 잉태되어 나심을 믿나이다.
성 요셉의 꿈에 나타난 주님의 천사는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 그 몸에 잉태된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마리아가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여라. 그분께서 당신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다.”(마태1,20-21)라고 말합니다.
이 ‘강생구속’의 교리는 ‘천주존재’, ‘삼위일체’, ‘상선벌악’과 더불어 가톨릭의 4대 교리를 이룹니다. 4대 교리는 우리의 믿음을 가장 함축적으로 표현한 것이지요. 오늘날 우리가 함께 “성령으로 인하여 동정 마리아께 잉태되어 나심을 믿나이다.”라고 고백하는 것은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심’(임마누엘)을 믿음으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시어 우리에게 오셨음을 고백하는 것이고, 동정 마리아가 아이를 잉태하여 낳음으로써 하느님의 구원사업에 협력했음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 두 사건은 하느님과 사람이 구원 역사 안에 함께 있음을 보여주는 신비입니다. 이 신비에 대한 믿음 안에서 우리는 동정 마리아에게 ‘천주의 성모’라는 칭호를 드립니다. 예수님께서 ‘참 하느님이시며 동시에 참 인간’이시므로 예수의 어머니이신 마리아는 ‘천주의 모친(Theotokos)’이시라는 것을 에페소 공의회(431년)는 선포한 것입니다. 또한 이 신비 안에서 ‘마리아의 원죄 없으신 잉태’와 ‘성모 승천’에 대한 믿음을 고백합니다.
동정녀 마리아는 하느님께서 사람으로 오실 수 있도록 자신의 ‘태’를 봉헌하셨을 뿐 아니라, 아들 예수님의 공생활과 십자가 아래에서, 또 초기 교회 공동체의 삶 안에서 하느님의 도구로서 전 생애를 봉헌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모 마리아께 공경의 마음을 드리는 것이지요. 갈릴래아 지방 나자렛 고을의 동정녀 마리아에게 파견된 가브리엘 천사는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다.”(루카1,28)라는 인사와 더불어 아들 예수님의 잉태와 탄생에 관한 소식을 전합니다.
이에 마리아는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1,38)라고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엘리사벳은 자신을 방문한 마리아를 맞이하면서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루카1,42)라고 인사합니다. 하느님께 오롯한 믿음을 드리고, 하느님의 부르심에 기쁨으로 응답하여, 하느님의 뜻을 따른 마리아는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루카1,45)이라고 칭송받아 마땅합니다.
우리는 매일 아침 6시, 낮 12시, 저녁 6시에 ‘삼종기도’를 바칩니다. ‘삼종기도’와 ‘성모송’을 바치는 것은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오심과 동정녀 마리아가 예수님을 잉태하고 낳으심을 통해 이루어진 놀라운 구원의 사건을 기억하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기도드리는 바로 그 순간 ‘임마누엘’을 떠올리는 일이요, 또한 하느님께서 우리의 하루 삶에, 전 생애에 함께해 주심에 감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따뜻하고 포근한 곳이 있다면, 어머니의 태, 어머니의 품, 어머니의 무릎이 아닐까요? 그 따뜻하고 포근한 어머니, 신앙의 모범이신 성모님과 함께 전 생애를 주님께 바칠 수 있는 삶의 여정을 걸어가야겠습니다.
| 쉽게 읽는 가톨릭 교회 교리서 |
“예수 그리스도께서 본시오 빌라도 통치 아래서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고 묻히셨다”
<가톨릭 교리서 571항~630항>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은 교회가 세상에 전파해야 할 기쁜 소식입니다. 하느님의 구원 계획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해서‘단 한 번(히브9,26)에 이루어졌습니다.”(571항)
예수님께서 공생활을 시작하실 때부터, 일부 바리사이들과 헤로데 당원들,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은 예수님을 없애버리기로 뜻을 모았습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행동을 보고 나쁜 생각을 가진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이 마귀에 들렸다고 의심하기도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을 모독하고 거짓 예언을 한다고 비난을 받았습니다. 이러한 일은 율법에 따라 돌로 쳐 죽여 처벌하는 종교적 죄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의 가장 작은 계명까지도 소중히 여기며 율법을 성취해야 한다고 여기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율법을 완벽하게 성취할 수 있었던 유일한 분이십니다. 유다인들은 율법을 작은 계명까지 완전하게 지키지 못했습니다. 이 때문에 이스라엘의 자손들은 해마다 속죄일에 율법을 어긴 그들의 죄에 대해 하느님께 용서를 비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유다인들과 그들의 영적지도자들의 눈에 ‘율법 교사’로 보이기도 했습니다만 동시에 율법학자들과 충돌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학자들의 해석을 넘어서서 “율법학자들과는 달리 권위를 가지고 가르치셨기 때문”(마태7,29)입니다. 그 말씀은 율법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방식으로 율법을 완성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수난받기 바로 전에 성전 건물의 돌들이 어느 하나도 제자리에 남아 있지 않을 정도로 파괴될 것이라고 미리 알려주십니다. 그러나 이 예언은 예수님께서 대사제의 집에서 심문 당하실 때 거짓 증인들이 “이 성전을 허물고 다른 성전을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고 했다며 고발하는 빌미가 되었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셨을 때는 사람들이 “성전을 허물고 사흘 안에 다시 짓겠다는 자야, 너 자신이나 구해보아라”(마태27,40)하며 예수님을 모독하기도 하였습니다.
“이스라엘 종교 지도자들은 율법과 예루살렘 성전 때문에 예수님을 ‘반대’하였지만, 그들이 예수님께 더 반발한 것은 죄인들을 대신하여 몸값을 치르신 그분의 소임 때문이었습니다. 그것은 하느님께서만 하실 수 있는 일이기 때문입니다”(587항) 하느님 한 분 외에 아무도 죄를 용서할 수 없다고 믿는 그들 앞에서 예수님께서는 죄인들을 용서하시니, 이는 인간으로서 하느님과 동등하다고 하는 것이며 하느님을 모독한 일이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행하시는 아버지의 일을 보고 당신을 믿으라고 예루살렘의 종교 지도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의회 법정은 예수님을 신성 모독죄로 사형에 처해야 한다고 판단했습니다. 의회 의원들이 이렇게 한 것은 “무지한 탓”이기도 했고, 또 “완고한” 불신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최고의회는 예수님을, 하느님을 모독한 자로서 “죽을죄를 지었다”고 선언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누구를 죽일 권한이 없어서 예수님을 정치적 반역자로 고발하여 로마인들에게 넘겨주었습니다. 대사제들은 빌라도에게 예수님을 사형에 처하라고 정치적으로 위협하였습니다.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님의 재판에 대한 이야기를 살펴보면, 예루살렘의 유다인 전체에게 그 재판의 책임을 지게 할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십자가 위에서 용서하심으로써, 예루살렘의 유다인들과 그 지도자들이 ‘몰라서’ 한 일임을 인정하셨고, 베드로도 그들이 “무지한 탓으로 그렇게 하였다.”(사도3,17) 라고 하였습니다. 교회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당시에 살고 있던 모든 유다인들에게 그리스도 수난의 책임을 차별 없이 지우거나 오늘날의 유다인들에게 물을 수는 없는 일이다. 교회가 하느님의 새로운 백성임에는 틀림없으나, 마치 성경의 귀결이듯이, 유다인들을 하느님께 버림받고 저주받은 백성인 것처럼 표현해서는 안 된다.”(「비그리스도교 선언」 4)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형벌을 받으신 것은 예수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고백하는 그리스도인들의 악습과 죄 때문입니다. 이미 주님을 안다고 고백하면서도 계속해서 죄를 짓는 것은 예수님을 못 박는 일이 됩니다. 예수님께서 죽임을 당하신 것은 불행한 상황들 때문에 생겨난 우연한 결과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하느님의 구원 계획의 신비에 속하는 일이었습니다.”(599항)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구원 계획을 이루시기 위하여 그들의 무지에서 나온 행동을 허락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죄 때문에 당신 아들을 넘겨주심으로써, 당신의 계획을 통하여 우리에 대한 끝없는 사랑을 드러내십니다. “그분께서 우리를 사랑하시어 당신의 아드님을 우리 죄를 위한 속죄 제물로 보내주신 것입니다”(1요한4,10).
예수님 생애 전체는 성부의 구원하시는 사랑의 계획을 받아들이고자 하는 바람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아버지에 대한 사랑으로 또 아버지께서 구하기를 원하시는 사람들에 대한 사랑으로 당신 수난과 죽음을 자유로이 받아들이셨습니다.”(609항) 예수님께서는 죽음을 넘어서는 부활의 신비에 참여할 가능성을 주십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제자들에게, 자기 십자가를 지고 당신을 따르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를 위하여 고난을 겪으심으로써 당신의 발자취를 따르라고 본보기를 남겨 주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죽음의 상태는 그분께서 묻히시고 저승에 가신 신비입니다.
무덤에 묻히신 그리스도께서는, 인간의 구원을 이루신 다음 하느님 안에서의 안식을 드러내십니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인간으로 사신 지상 생활을 마감했다는 의미에서 진정한 죽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분의 육신은 다른 시체들처럼 썩어 없어지지 않았습니다. “하느님의 힘이 그리스도의 육신을 부패하지 않게 하였습니다.”(627항)
“우리는 그분의 죽음과 하나 되는 세례를 통하여 그분과 함께 묻혔습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영광을 통하여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신 것처럼, 우리도 새로운 삶을 살아가게 되었습니다.”(로마6,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