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서 보라“
요한이 자기 제자 두 사람과 함께 서 있다가 예수님께서
지나가시 는 것을 눈여겨보며 말하였다.
“보라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요한복음 1, 36) 연중 2주일 요한복음의 말씀은 예수님의 첫 제 자들에 대한
내용입니다.
공관복음
(마태오, 마르코, 루까)과는 달리 구조와 내용이 전혀 다른 형태의 말씀입니다.
세례자 요한
의 두 제자는 자기네 스승인 요한의 말을 듣고 예수님의 첫 제자 가 됩니다. 세례자 요한이
지나가는
예수님을 눈여겨 본다는 것은 예수님에 대해 무엇인가를 알리려는 눈치였고, 두 제자에게 “하느 님의
어린양“이라 선언함으로 자기 제자를 예수님과
맺어주게 됩니다.
사실 요한복음은 예수님에 대한 요한의 증언을 중요시 합니 다. 요한이 말하는 ‘하느님의 어린양’이라고
말하는 증언은 유대 사람들의 죄를 대신 속죄하기 위해 성전에서 피 흘려
바쳐지는 희 생양을 뜻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피 흘림으로 죄를 용서받는 다고 믿었습니다. “모든 것이 피로써 깨끗해지며 피 흘림이 없이
는 죄 사함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히브리서(9,22)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후,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이 죽임 당한 사실에 주목 하였습니다.
그들은
유대교 성전에서 속죄의 제물로 바쳐지는 어린양과 같은 분이 예수님의 삶이었다고 믿게 됩니다.
오늘 복음은 ‘하느님의 어린양’이라는 요한의 증언을
소개하고, 그 증언을 들은 두 제자가 예수님을 따라가
그분과 함께 머물렀다 고 전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사실을 알았다 고 전합니다.
즉
세례자 요한의 증언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졌음을 시사하며 이제 세례자 요한은 복음에서 서서히 자취를
감추게 됩니다.
그리고 세례자 요한의 제자 둘이 예수님을 “따라감“으로 예수님께 신뢰를 두고 그분의 삶을
따르려는 그들의 첫 걸음으로 이해됩니다. 그런 이들에게 예수님은 묻습니다. “무엇을 찾고 있 느냐?” 조금
동문서답 같지만 제자들은 “랍삐 어디에
묵고 계십니 까?”하고 대답합니다.
즉 예수님을
랍삐(선생님)라고 부르는 것 은 그분께 무엇을 배우고자 하는
마음입니다. 즉 그들이 찾고 있 던
것은 예수님이었고 그 예수님의 삶의 방식을 배워 살고자 함이 었습니다. 여기에 예수님의 대답은 “와서
보라“는 초대말로 이어집니다. 하느님의 삶을 산다는 것은 한
마디로 설명되는것이 아니 니 와서 보고, 함께
살며 큰일을 보게 될 삶을 살아라하고 말씀 하 십니다. 이제 이 말씀으로 제자들이 예수님께 물었던 “어디에
묵고 계십니까?”에 대한 대답이
실제로 이루어지게 됩니다. 예수님과 함께 머물며 무엇인가를 듣고 배우려는
원의가 구체적 으로 밝혀진
셈입니다.
즉 그들은 세례자 요한으로부터 들을 “하느님의
어린 양” 더 분명히 알고자 했던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신앙인이 예수님을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예수님과 함께
머무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또 이렇 게 말씀하십니다.
“내 안에 머무는 사람, 그리고 내가 그 안에
머무는 사람, 그런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습니다.” (15,5)
즉 예수님과 함께 머물러서 열매를 맺는다는 말이겠지요. “내 사랑 안에 머무시오.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분 사랑
안에 머무는 것처럼, 그대들이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 물 것입니다.”(15,9-10).
예수님과 함께 머무는 것은 그분이
보여준 아버지의
사랑을 실천하는데 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 는 제자는
그분이 실천한 그 사랑을 배우고 실천하여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문다는 말입니다. 오늘 복음의 제자들이
예수님과 함께 머문 후, 예수님을 메시아라고 말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예수님의 사랑
안에 머물러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분이 보 여준 사랑을 실천해 본 사람이 그분을 메시아로 깨닫는다는
말 입니다. 우리는 세례를
통해서 예수님의 형제요, 제자가
되었습니다. 오늘 세례자 요한의 선포한 바와 같이 하느님의 어린양을
따라감으로 그분의 삶의 방식을
찾아야 합니다. 우리의 일상 가운데에 그분을 모셔드려야 합니다. 먼저
예수님은 우리게
묻습니다. “무엇을 찾고 있느냐?”
그렇습니다. 우리가 신앙에서 찾는것은 무엇일지 먼저
대답해야 합니다. 남보다 내가 우선인
삶,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을 더 굳건히 지키려는
마음, 내가 남보다
낫다는 우월감, 명예, 지식,………
우리가 신앙에서 찾는 것들은 그저 나 하나 잘되려는
구원이나 하느님께 잘 보여 우리가 필요한 것들을
얻어내는 것이 신앙에서 우리가 찾아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참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예수님과 머물며
그분의 사랑을 체험하고 그분 사랑의 목격자, 증인이 되어야
합니다. 그분과 함께 머무는 삶이란 기도 의 삶을
말합니다. 예수님과
머무는 기도 없이는 그분의 사랑도 배울 수 없고 그분의 삶도 살아갈 수 없는 것이 지명한
일 아니겠습니까?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과 함께 묵었던 안드레아는 자기 형 시몬 을 예수님께 데려왔습니다. 예수님은 그를
‘눈여겨보며’
그의이름을 바꿔놓습니다. 예수님을 만나고, 그분의 말씀을
들으면 사람이 달라진다는 뜻입니다.
세례를
받을때 우리도 하느님을
중심으로 사는 새 사람으로 태어날 것을 약속하면서 우리가 부 모님에게 받은
이름이 바오로,
마리아, 데레사, 아네스 등 이름이 바뀌었습니다. 즉 우리도 세례를 받음으로 예수님을 만나고
그분의 말씀을 들어 바뀐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에 대한 우리의 믿음은 그분을 ‘하느님의 어린 양’, 곧
그분의 죽음에서 부터 시작한다고
전합니다.
그 이해가 깊어지는 것은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 머물며, 그분이 사신 사랑을 우리도 살아내야 가능한
일입니다. 곧 이웃을
위해 스스로를 내어주면서 자기 죽음을 실천해야 되는 일입니다. 신앙인은 자기만을
생각하지 않고, 예수님에
대해 알아듣고,
그분이 실천한 큰 뜻을 실천합니다. 신앙인은
그 실천 안에 우리를
구원으로 인도하는 메시아를 깨닫습니다.
그리고 신앙 인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사랑을
실천하는 하느님의 자녀가 됩니다. “와서 보아라.”하신
예수님의 초대에 이제 우리가 “가서 그분의 사랑을 봐야“할 것입니다. 그리고 살아내야 할 것입니다.
– Fr. 김 두진(바오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