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사회적 동물이다"라는 말을 굳이 인용하지 않아도 사람이 혼자 있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오늘 제 1독서에서 말합니다. "사람이 혼자 있는 것은 좋지 않다" 사람이 다른 사람들과 유대를 갖는다는 것은 중요한 게 아니라 기본적으로 충족되어야 할 조건입니다.
오늘 제 1독서를 읽어보면 옛날 이스라엘 사람들도 사람과 사람의 결합이 중요하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었습니다. 여자가 남자의 본질, 즉 남자의 뼈에서 나온 뼈, 살에서 나온 살로 만들어졌다고 전합니다. 여기서 조심해서 알아들어야 할 것은 여자가 남자의 일부를 취하여 만들어졌기 때문에 남자보다 열등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만약에 그렇다고 우기는 남성이 있다면 흙으로 만들어진 남성은 흙보다 더 열등하다고 우기는 것과 많이 다르지 않을 것 같습니다. 사실 성서에서 보는 여자는 남자에게 꼭 맞는 파트너입니다. (ezer 이 말이 보통 "협조자"로 번역되고 있는데, "파트너"라고 옮길 때 히브리어의 원어의 의미가 훨씬 더 잘 전달된다고 성서학자는 말합니다.)
남자와 여자는 똑 같은 뼈와 살로 만들어졌습니다. 달리 말하면, 그들은 동등한 인간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뼈와 살은 또한 비유적으로도 이해 될 수도 있습니다. "뼈"는 강한 힘을 의미하고 "살"은 연약함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이 두 말이 의미하는 바는 인간이 가지는 성격의 모든면 즉, 하나에서 열까지 다 포함하여 그들이 서로에게 꼭 맞은 파트너라는 의미입니다. 이런 엮임의 가장 확실한 표현이 결혼이며 새 가정의 탄생이 아닐까요?
오늘 복음의 주제도 결혼의 의미에 대해 말합니다. 사실 유다인의 법은 이혼을 허용합니다. 해서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예수님에게 묻습니다. "남편이 아내를 버려도 됩니까?" 이 질문은 사실을 알아보려고 물은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모세의 전통을 비판하고 다른 사람들과 상반되는 입장을 취하려 하는지 속을 떠보면서 올가미를 씌우려 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올가미에 걸리지 않았습니다. 모세의 관습에 잘못된 데가 없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사실 예수님께서 이혼을 단죄하신 말씀을 초대교회에서는 여러 가지 모양으로 해석했습니다만 지면 관계상 생략합니다. 특히 오늘 복음의 마르코 공동체는 예수님의 말씀을 곧이곧대로 따랐습니다. 그럼 오늘날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예수님이 반 이혼법을 제정하셨다고 볼 수 있을까요? 그렇게 본다면 예수님은 한갓 입법자 아니면 율사의 범주에 속할 것입니다. 그렇게 보기보다는 일방적으로 아내를 버리는 남편들에게 일갈하시는 예언자적 외침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다. 당대의 바리사이들에게 어떤 이유로 아내를 버릴 수 있을까 따지기 전에 어떻게 하면 "둘이 한 몸이 되는 것"일지 노력하라는 외침으로 알아들어야 합니다.
사실 이혼이라는 사실 하나만 놓고 보면 교회 안에서 이혼을 허용해야 하는지 아니면 반대해야 하는지를 따지기 이전에 아주 슬픈 일입니다. 문제는 이혼 발생률이 점점 높아지는데 더 큰 슬픔이 있습니다. 이혼 가운데 어떤 경우는 혼인관계가 해지 되지만, 처음부터 혼인관계가 형성되지 않았던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더 심각한 문제는 아예 혼인을 겉모양이나 가진 것만 보고 맺음으로 서로의 관계를 고려하지 않은 결혼이 많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비극입니다. 왜냐하면 결혼이란 부부간 인간적 성취와 행복을 위해 절실히 필요한 서로의 유대관계를 나타내는 것인데 이혼은 이런 유대관계가 없었다는 것을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오늘 화답송에서 노래한 것처럼 주님은 한평생 모든 날에 복을 내리시리라하며 모든 사람들을 축복하심을 노래합니다. 부부의 결합은 사랑의 결실인 자녀를 세상에 태어나게 하고 또 다른 유대관계를 탄생시킵니다. 해서 가족이라 함은 과거와 현재의 연결입니다. 부모가 자녀들과 연결됨으로써 부모는 자녀에게 과거의 유산을 넘겨주고 자녀들이 부모와 연결됨으로써 부모는 자녀들에게 미래의 가능성을 열어 줍니다. "너의 밥상에 둘러앉은 아이들은 올리브 나무들 햇순같이" 부모의 삶을 풍성하게 해 줍니다. 자녀들이 우리의 미래이며 희망인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오늘 복음의 말미에 나타난 예수님이 어린이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그림은 우리가 쉽게 상상할 수 있는 그림입니다. 그러나 고대 중근동 문화에서는 어린이들은 남자가 아닌 여자의 세계에 속해 있었기에 그리 쉽게 그려지는 그림이 아닙니다. 성서에 나오는 여자들과 외국인 이방인들처럼 어린이들도 쉽게 위험을 당하는 부류였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어린이들을 환영하는 모습으로 묘사된 것은 그 어린이들이 귀여워서 뿐만 아니라 그들이 위험하며 다른 사람들의 보호를 필요로 하기 때문이었습니다.
"어린이처럼 하느님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결코 그곳에 들어 갈 수 없다." 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그 나라는 가난한 사람들 차지이며 굶주리는 사람들은 배부르게 되고 슬퍼하는 사람들은 위로를 받게 된다는 행복선언문과 같은 맥락의 말씀입니다.
어린이처럼 양육과 보호를 받아야 하기에 다른 사람들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는 어린이들을 우리 앞에 세워놓는 복음의 의도를 알아들어야 합니다. 이렇게 양육과 보호를 받아야 하는 우리의 이웃을 우리 앞에 세워놓는 것은 하느님 앞에 우리가 어떻게 서 있어야 하는지를 보여 주는 것입니다. 오늘 제 2독서에서 말하는 것처럼 예수님은 우리의 뼈요 우리의 살을 가지고 우리 중에 한 사람이 되셨습니다. 우리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 그분은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았습니다." 그분은 희생물이었을 뿐만 아니라 대 사제였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서의 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들을 거룩하게 해 주시는 분(예수님)이나 거룩하게 되는 사람들(우리 모두는)이나 모두 한 분에게서 나왔습니다." 그런 까닭에 우리는 하느님의 관계 안에서 예수님의 형제자매가 된 것이라고 말합니다. 오늘 복음은 우리는 혼자가 아니라 주님의 가족이라 말하며 주님의 가족이 가져야 하는 연대와 엮임이 무엇인지를 알고 그렇게 살라하십니다.
– 김두진 바오로 신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