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11월 16일 연중 제 33 주일 Fr. 김두진(바오로)강론

 

11 16일 연중 제33주일

 

헤로데는 유다인들의 호감을 얻으려고 기원전 20년경 성전을 증축하기 시작한다. 그는 솔로몬 성전을 능가할 계획으로 성전이 산 전체를 덮을 정도로 큰 성전 지대를 건설하고 그 위에 성전을 세웠는데, 그 성전 지대의 크기가 어마어마하였다. 기원전 4년 헤로데가 죽은 뒤에도 공사는 계속되어 예수님 시대를 지나 기원후 64년까지 이어진다. 오늘 복음에서 사람들이 보았던 성전도 여전히 증축 중인 성전이었다.

오늘 복음에서 몇몇 사람이 하느님 현존 장소이며 이스라엘의 자부심인 성전의 위용에 감탄하자 예수님께서 "너희가 보고 있는 저것들이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남아있지 않고 다 허물어질 때가 올 것이다." 라고 하신다. 그러자 "그런 일이 언제 일어나겠습니까? 또 그 일이 벌어지려고 할 때에 어떤 표징이 나타나겠습니까?"(루카 21,7)하고 묻는다. 이에 예수님은 거짓 메시아의 출몰, 전쟁과 반란, 지진과 기근과 전염병, 무서운 일들과 큰 표징들에 대해 미리 예고하신다. 참으로 무서운 이야기다. 하지만, 인류 전체를 대상으로 닥칠 일이라 각 개인으로서는 별로 실감이 나지 않는다. 아마도 운 좋게 비켜 갈 요행이 나에게 주어질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감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더 아픈 이야기를 하신다. "이 모든 일에 앞서"(루카 21,12) 박해와 신문, 미움과 죽음까지 겪으리라고 하시는데, 그것도 믿고 가깝게 지낸 가족, 친척, 친구들에게 등 돌림 당하고 죽게 되다니 천재지변이나 전쟁 예고보다 더 아프다.

이에 대한 대응책은 뭐가 없을까 싶은데 "너희는 인내로써 생명을 얻으라"고 하시니 원칙적이고 원론적인 대답이 조금은 답답하다. 뭔가 더 특별하고 확실한 방법을 콕 집어 주셔야 할 것 같은데 그냥 인내하라 신다. 그런데 잠시만 생각해보면 우리 편에서 인내 밖에 달리 취할 수 있는 방법이 없지 않나 싶다. 꾸준히 주어진 일상을 채워 나가며 십자가와 고통을 받아들이다 보면, 박해도 증언의 기회가 되고 지혜와 언변도 쌓아지지 않겠나 싶다.

1독서에서 예언자는 "다가오는 그날"(말라 3,19)에 대해 선언한다. 불붙는 날이 거만한 자와 악을 저지르는 자를 불살라서 뿌리조차도 남기지 않을 것이지만 나의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의로움의 태양이 날개에 치유를 싣고 떠오르리라."(말라 3,20)고 하신다.

하느님께 대한 경외심은 갑작스럽게 생겼다 사라지는 일회성 감정이 아니다. 경외는 지혜의 산물이며 그분을 알아 모시는 항구하고 충실한 관계성의 열매다. 악행을 거듭할수록 악에 무뎌 져 더 큰 죄를 쌓아 가듯이, 주님을 경외하는 마음도 쌓이고 쌓여 덕인 줄도 모르게 그의 인성이 되고 영성이 되어 가는 법이다. 작은 불은 바람 앞에서 쉽게 꺼지지만 큰 불은 바람 앞에서 활활 타는 법이다. 마찬가지로 믿음이 큰 사람은 환난 앞에서 그 진가를 드러낸다. 믿음의 사람은 이런 저런 소문으로 휘둘리지 않고 이렇다, 저렇다니 쉽게 판단하고 단정 지으며 함부로 이야기하지 않는다.

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테살로니카 공동체를 위해 자기들이 보여준 모범에 대해 솔직히 이야기하면서 권고한다.

 "묵묵히 일하여 자기 양식을 벌어먹도록 하십시오."(2테살 3,12) 이 특별할 것 없는 권고는 사실 교회 공동체를 이루는 모든 그리스도인의 근간이다. 각자 받은 고유한 은사에 따라 소박하고 충실하게 개인의 소명을 채워가는 것을 말한다. 일상을 꽉꽉, 충실히 채워갈 때 헛된 허세나 기만에 빠지지 않는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특별할 것 하나 없는 지금 여기서 보물을 길어 올리는 사람들이다.

종말이 언제 올지, 세상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 내게는 구체적으로 어떤 일이 닥칠지 우리는 모른다. 다만 "그날"이 우리의 일상 가운데 급습하리라는 것만 말씀을 통해 어렴풋이 짐작할 따름이다. 지상에서 허락 받은 삶을 나름 채워가던 모습 그대로 종말을 맞이할 것이고, 또 그 모습에 맞갖은 보상이 주어질 것이다. 그렇다면 종말을 기준으로 전(Before)과 후(After)는 별 차이가 없을 것 같다. 충실히 하느님을 경외하며 감사와 사랑과 정의와 자비로 영혼을 채운 이들은 그 모습대로 주님을 맞이해 일치를 이루는 영원한 생명으로 들어갈 것이고, 회개를 미루고 탐욕과 욕정과 이기심을 채우느라 급급하던 이들은 사람의 아들이 오셔도 만족을 모르고, 더 채우고 더 쌓고 더 즐기는데 급급할 것이다. 그게 징벌이 아닐까 싶다.

"그날"이 오기 전에도(Before), "그날"이 온 뒤에도 (After) "저는 하느님 곁에 있어 행복하옵니다."라는 영성체 송 고백이 일상이 되면 충분하지 않을까? 지금 하느님 곁에 있어 행복한지, 십자가와 고통을 껴안은 채로 하느님 때문에 행복한지 가 중요하다. 그럼 "그날"은 두려움으로 맞이하게 될 날이 아니라, 이제껏 간직하고 누린 그 행복이 영원으로 연장되는 교차점이 될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다 무너지게 될 성전()을 가지고도 주눅 들지 않으며 기뻐한다. 끝은 또 다른 행복의 시작임을 알고 믿기 때문이다.

"그러나 너희는 머리카락 하나 잃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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