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21일 대림 제 4 주일
마태오 복음사가는 구약의 예언이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모두 이루어졌음을 증언하는데 많은 관심을
쏟는다. 그래서 다른 복음서에 비해 구약성경을 더 자주 인용한다. 오늘 복음에서도 마태오는 마리아가
동정으로 예수를 잉태하게 된 것을 두고 1독서에서 봉독된 이사 7,13의 예언이 이루어지기 위한
것이었다고 전한다.
"동정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하리라". 오늘 미사의 말씀들 안에 무려 네
차례나 이 구절이 반복되어 나온다. 반복은 강조와 집중의 의미다. 말씀이 사람이 되신 강생의 신비에서
가장 중요하고 확연한 표징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처럼 성탄에 가까워질수록 전례는 우리를 더 단순하고
집약된 말씀으로 우리를 더 깊고 심오한 신비로 들어가도록 이끌어 준다.
사실, 이사야가 이 예언을 하였을 때에는 북쪽 이스라엘 왕국이 아람과 손을 잡고 자신들이 이끄는 반
아시리아 연합 전선에 동참하지 않으려던 남쪽 유다 왕국을 치러왔을 때였다. 이사야는 그들을 괴롭히던
북쪽 이스라엘과 아람이 아시리아에 의해 철저히 파괴될 것이라고 예언하면서(이사 7,17), 그 표징으로
아이가 탄생할 것이라고 예언한다. 그런데 마태오 복음사가는 이 예언이 예수님에 관한 예언이었다고
한다. 왜냐하면 히즈키야 임금 시대 때 다시 회복된 약속의 나라는 얼마 지나지 않아 철저히 파괴되기
때문이다. 하느님이 통치하시는 나라는 이처럼 얼마 지나지 않아서 다시 파괴될 나라가 아니라, 영원히
존속할 나라이다. 마태오에 따르면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영원한 하느님의 통치가 시작되는데,
동정녀에게서 아이가 탄생하게 된 사건은 이사야가 예언한 약속의 땅, 곧 하늘나라가 드디어 시작되었음을
알려주는 표징이었다.
2독서의 사도 바오로 역시 이 점을 분명히 밝힌다.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죽음과 부활은 이미
구약에서부터 예언되었던 것으로, 하느님께서 이 세상과 함께하고 계심을, 하늘나라가 와 있음을 극명하게
드러내는 일이었다는 것이다(로마 1,2). 이것이 바로 하느님의 복음, 곧 하느님께서 밝혀주신 기쁜
소식이며, 바오로 사도는 자신이 이 복음을 선포하는 사도직의 은총을 받았다고 이야기한다.
복음은 요셉이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인 경위를 전한다. 요셉이 마리아와 파혼하려 결심한 것은 마리아에
대한 사랑과 염려, 호의에 의한 결정이었지만, 그의 꿈에 천사를 보내신 주님의 개입으로 마리아를 아내로
맞게 된다. “다윗의 자손 요셉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 그 몸에 잉태된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고민의 실타래가 풀리면서 마리아를 아내로 맞이한다. “요셉은 주님의
천사가 명령한 대로 아내를 맞아들였다.”“주님께서 예언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이 모든
일이 일어났다.”(마태 1,22). 요셉의 새로운 결단은 마리아에 대한 오해가 풀려서일 수도 있겠지만,
말씀에 대한 그의 경외심도 간과할 수 없다. 이스라엘의 모든 경건한 이에게 반드시
이루어져야 할 약속이다. 다윗 자손으로서 의롭고 경건한 요셉에게도 역시 하느님의 말씀은 반드시
이루어져야 했다.
요셉은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였다. 요셉은 자기 삶의 상식을 버리고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인 것이다.
요셉에게 닥친 일은 믿음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고, 믿음이 없이는 받아들일 수 없는 불가사의 한 일이다.
그런데 성경은 그에 대한 해명도 설명이 하나도 없다. ‘믿으려면 믿고, 안 믿으려면 말라’는 식이다.
그러나 사실 이것이 믿음이다. 예수님의 탄생은 이렇게 보통사람과는 달랐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아들로 이 땅에 태어나셨다. 물론 마리아의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1,38). 한 순명도 기억해야 한다. 분명한 것은, 모든 것 다 설명해 주고 다
보여준 다음에 믿으라고 하면 그것은 믿음이 아니라 사실 확인에 불과한 것이다. 믿음은 바로 어려운 일에
처했을 때 그 빛을 발하게 된다. 내 뜻을 내려놓고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이는 것이 신앙이다.
하느님께서 선물로 주신 인간의 구원은 예수님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그리고 구원의 완성을 위하여 인간의
협력을 원하신다. 주님께서는 인간과 더불어 세상을 구원하고자 하신다. 그것은 하느님께서 주신 인간의
자유의지를 존중해 주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응답이 필요하다. 그리고 이 응답을 믿음이라고
말한다. 결국 구원은 하느님의 부르심과, 믿음으로 표현되는 인간의 응답으로 이루어진다. 믿음에 따르는
순명이란 이성적이고 합리적이고 마땅하고 옳은 일에 응답하는 것이 아니라 비상식적이고 비논리적이며
이해하기 어려운 상황에서도 주님의 뜻이기에 받아들이는 것이다. 물론 거기에는 고통과 시련이 동반할
수도 있다.
모든 갈등과 상처를 가슴에 담고 남모르게 파혼하기로 작정한 요셉의 태도를 생각해 보자. 일반적으로
약혼자가 임신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아무리 조용히 처리한다고 해도 율법에 의해 처리해야 하므로
사람들에게 알려야 했고, 결국 돌에 맞아 죽을 운명을 만들어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요셉은 세상에
드러내지 않으려 율법을 어기면서까지 마리아를 보호한 사랑의 사람이었다.
궁지에 몰린 마리아를 감싸주며 풀어주려 했던 요셉을 닮은 우리였으면 한다. 요셉은 남의 허물을
덮어주고 격려해 주는 사람이었다. 힘겹고 어려워하는 이들과 마음을 나누는 사람, 만나면 위로와 기쁨이
되고 하느님의 축복이 되어주는 사람이 바로 그런 사람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그리스도의 ‘오심’과
눈앞에 다가와 있는 성탄은 그분의 사랑을 믿는 이들 모두의 용기 있고 폭넓은 협조 없이는 실현되지 못할
것이다. 하느님께서 당신의 구원계획을 이루시기 위해 지금 이 순간에도 나의 협조를 원하신다는 것을
알고 즉시 응답을 드릴 수 있도록 하여야 하겠다. 대림 마지막 주간을 지내면서 다시 한 번 주님의 날, 곧
하느님의 통치, 하늘나라가 하루빨리 이루어지기를 기도하며 하늘나라의 시작을 알리는 아기 예수님의
오심을 준비하는 우리였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