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4월 12일 부활 제 2 주일 Fr.김두진(바오로)강론

 

 

4 12일 부활 제2주일

평화가 너희와 함께……. 평화라는 단어가 생소하다. 계속되고 있지만 잊혀가는 소련과 우크라이나의 전쟁, 미국과 이스라엘이 한편이 되어 이란을 석기 시대로 되 돌려놓겠다는 으름장과 함께 진행되고 있는 혹독한 전쟁 가운데에서 평화를 말할 수 있을까? 결국 파괴, 죽음, 권모술수, 전쟁의 여파로 이어지는 고유가 등 전쟁이 만들어내는 혹독한 현실만을 볼 뿐이다.

 

다툼이나 갈등 없이 평온하고 서로 화목한 상태를 평화라고 한다. 사실 인생살이에서 아무런 다툼도 없고 갈등도 없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믿음이 살아나고 사랑이 움터 부자와 가난한 자, 높은 자와 낮은 자 모두 손을 맞잡고 어깨를 나란히 하며, 남음도 모자람도 없는 대동(大同)의 사회, 정의와 평화가 강물처럼 흘러 서로 사람답게 살 수 있는 공동체인데, 절대 어울릴 수 없을 것 같은 사람들의 살육과 파괴는 평화라는 단어와 너무 어울리지 않는다. 세상 사람들은 하나같이 평화를 원하지만, 평화를 해석하는 방식에는 차이가 크다. 부자와 가난한 자, 권력자와 서민, 강대국과 약소국 사이에서 평화는 곧 부자와 권력자, 강한 힘을 자랑하는 국가의 생각대로 움직이는 것이 세상의 평화이다. 세상은 평화라는 소중한 언어를 갖고 있으면서도, 또 그것을 간절히 원하면서도 갈등 속에서 살아간다. 평화를 말하면서도 무기를 만들고, 평화를 운운하면서 힘없고 가난한 자들을 내리누르려는 힘 있는 자들의 편리한 평화만 생각한다. 그래서 상대방을 단숨에 무너뜨릴 정도로 절대적 힘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세상의 '평화 논리'는 거짓되고 허황된 주장일 뿐이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평화란 어떤 평화일까? 또 그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이란 누구일까? 예수님께서는 평화와 평화를 일구는 일꾼으로서 제 역할을 하려면 무엇보다도 우선돼야 할 조건을 갖추기를 요구하신다."'평화가 너희와 함께!'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요한 20,23). 참된 평화는 하느님으로부터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통해 성령 안에서 이뤄져야 한다. 평화의 일꾼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성령 안에서 누구의 죄든 용서하기 시작한다면, 거기서부터 평화가 시작되고 믿음과 사랑이 되살아나게 된다는 말씀이 아니실까?

 

사실, 부활 첫째 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찾아와 자비와 사랑을 베푸셨지만 그들은 여드레 날에도 여전히 의혹과 불신으로 두려움에 떨며 문을 닫아걸고 집안에 모여 있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문이 다 잠겨 있었는데도 들어오시어 그들 한 가운데 서시며(요한 20,26) 토마스와 제자들에게 말씀하신다. 네 손을 뻗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리고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요한 20,27)

 

토마스는 어쩌면 현대인의 모습을 대변하는 우리들의 쌍둥이가 아닐까 싶다. 토마스는 예수님을 사랑하고 그분과 함께 죽기를 원했으며 그분과 함께 있기 위해 어디로 가느냐고 묻기도 했었다.(요한 11,16; 14,4-5) 이렇게 열정적이었던 그는 남의 체험이 아닌 '나의 체험'을 원한다. " 나는 그분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직접 보고 그 못 자국에 내 손가락을 넣어 보고 또 그분의 옆구리에 내 손을 넣어 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 이 질문은 고집이 아니라, 신앙이 자기 삶 속에서 실존적인 믿음으로 들어와야 한다는 절박한 몸부림이었다.

 

토마스는 그렇게 부활을 불신하고 거부하고 있는 자신을 이미 환히 알고도 믿고 용서하시는 그분의 사랑과 자비를 체험하게 된다. 마치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하고 나서야, 그 배신을 미리 다 알고도 먼저 믿어주고, 먼저 용서하고, 먼저 사랑하신 그분의 자비를 깨닫고 울었던 것처럼 용서와 사랑에 비로소 토마스는 의혹과 불신의 벽이 무너지게 된다. 바로 이 용서의 체험과 자비의 체험이야말로 바로 부활의 표시라 할 수 있다. 바로 여기에서 그의 불신과 의혹은 믿음으로 바뀌고, 그의 거부는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요한 20,28)이라는 탄성으로 터져 나온다.

 

토마스가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이라고 고백할 수 있었던 것은 단순히 상처를 보았기 때문이 아니다. 불신하는 자신을 이미 알고 계셨지만, 그럼에도 먼저 찾아와 용서하신 그분의 '사랑'을 체험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활의 삶은 용서와 자비를 입었으니, 이제 우리도 자비를 베푸는 일꾼이 되어야 한다. 용서는 우리를 위해 생명을 내어주신 그리스도께 드리는 가장 큰 감사이자 부활의 증거다.

 

그리스도교는 근본적으로 보고 나서 믿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보게 되는 종교이다. 다시 말해, 알고 나서 믿는 것이 아니고 믿음으로 알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일반적으로 예수님의 부활을 전혀 믿지 못한 토마스의 불신앙과 의심을 책망하며, 그를 회의론자나 의심하는 사람의 대명사로 말하지만, 토마스가 보인 행동은 단순한 회의론자로서 막연히 부정을 위한 의심이 아니라 자신의 믿음을 더욱 확고하게 하기 위한 몸부림이었고, 그를 통해서 토마스는 누구보다 더 강한 믿음을 가지게 되었음을 기억해야 한다. 그래서 믿음은 부모님의 신앙, 이웃의 신앙에 기대어 가는 '3인칭 신앙'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철저히 개인적인 결단과 도전을 통해 "나의 하느님" 이라고 고백할 수 있는 체험적 신앙으로 나아가야 한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오늘도 우리의 닫힌 마음의 문을 열고 찾아오신다. 아직 믿음이 성글고 굳게 닫힌 우리 마음에 들어오시어 다정하게 말씀하신다. "네 신앙으로 내 옆구리에 손을 넣어 보아라. 그리고 의심을 버리고 나를 믿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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