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놀러다니는 양로원의 할머니 또 한 분이 돌아가셨다.
가면 넓은 테이블에 둘러앉아 함께 세상사는 이야기를 나누던 이들이 벌써 그 과반수나 우리와 헤어지고 더 이상은 사람의 눈으로 서로 바라보며 사람들의 말로 얘기를 나눌 수는 없게 되었다.
바로 전에도 곁에서 악수도 나누며 웃고 말도 했던 이들이 그곳에 가도 이제 그자리에
없다는 사실이 나에게 삶과 죽음을 또 한번 생각할 동기를 만들어주고 어쩌면 죽음이란 현상은 참으로 신비스럽다는 느낌이다.
죽음을 생각한다고 해도 여전히 너무 막연하고 두렵고 또 호기심도 섞여 함께 한다.
1. 죽음은 무엇인가?
사전에서는 (생명활동이 정지되어 다시 원 상태로 돌아오지 않는 생물의 상태로서 생 (生 ) 의 종말을 말한다)고 죽음을 정의하고 있다.
이것이 죽음에대한 세속적인 해석이다.
죽음은 곧 끝이며 그 이후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 정의를 바탕으로 하는 사상을 따르는 많은 이들이 이즈음 소유권이나 선택권의
몰이해로 생명을 인위적으로 연장 또는 단축을 시도하는 무리한 행위를 보게된다.
자해및 자살행위, 단지 미용효과를 위한 성형수술, 문신행위, 스스로가 부활의 희망으로 시체를 냉동하는 행위등은 창조주의 뜻에 반하는 일이다.
2. 죽음에 대한 종교적 개념
(불교)
불가의 가르침에서는 삶과 죽음이 모두 삼라만유의 한 현상일뿐 죽음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즉 삶이 곧 죽음이며 죽음이 삶의 연장이므로 생명의 영원성을 말하고 있다.
이승에서의 업보에 따라 각종 다른 형태(동물등)로 환생하게된다는 윤회설은 이 세상에서 육신을 가지고 일생만 살 수있는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에 의한 생의 영원성에 위배하지만 환생의 고통이 궁극적으로 해탈하여 천국에 이르는 데 그 목적을 둔다는 점으로는 영혼이 연옥의 고통을 통하여 정화되어 하느님 나라로 구원하려는 하느님의 구원계획과 영적으로는 공감되는 부분도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그리스도 교회)
그리스도로서의 예수님의 삶과 죽음과 부활은 곧 모든 영혼의 구원사업을 이루려는 하느님의 창조계획을 분명하고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건이며 따라서 육신을 가진 사람의 이승에서의 죽음도 부활을 통한 영원한 삶으로 옮겨가는 한 과정으로서의 창조세계의 자연현상으로 또 생명의 완성을 이루는 길의 과정으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선한 사람도 악한 사람도)
이 세상에서 선한 사람도 또 악한 사람도, 죄인도 의인도 모두 죽음을 맞게된다.
그리스도 신앙인의 삶의 모습은 어떤 것이어야 할까?
그리스도 신앙인의 죽음을 맞이하는 모습은 어떤 것이어야 할까?
그리스도 신앙인에게 있어 이 세상에서의 축복은 무엇이며 또 고통과 불행은 무엇일까?
신앙인으로 살아가는 모습에서도 병을 얻어 아프게 되거나 물질적 어려움을 만나면 흔히 “왜?”, “왜 하필이면 나인가?” 그런 생각에 빠지는 것을 보게된다.
그런 현상을 자신의 죄값으로 몰아가기도 한다.
반대로 건강하고 물질적인 부유를 누리게되면 (나)는 선택되어 축복받은 것으로 치부한다. 이것들은 다 살아가면서 얻은 삶의 한때의 한 모습일뿐 어느쪽도 모두 하느님의 은총이고 축복일 것이다.
왜냐하면 지금 축복을 받았으면 기쁜 일이고 지금 불행을 만나 괴롭고 슬프면 지혜로 그 어려움을 잘 이겨내어 후에 하느님의 축복을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어느 때이냐 시간의 다름일 뿐일 것이다.
창조주, 하느님은 창조세계 전부를 주관하지만 창조세계에 대한 그 가호는 창조세계로 하여금 진화법측과 피조물 각개의 활동조건등에 의해 자연적으로 자유롭게 진행되도록 하시기 때문이다.(J.H. Newman 의 Prediglen der Katholishen 중에서)
따라서 어려움도 고통도 또 죽음까지도 수십억의 인간 생명중에서 나에게만 특별히 선택적으로 특별은총을 바라는 것은 모순일지도 모른다.
고통이나 죽음이 다른 이는 몰라도 (나)만 피해가기를 바라는 것은 무리가된다.
그런 경우가 발생한다해도 그것은 하느님의 고유한 선택 몫일 것이다.
(죽었다가 살아 난 이들)
라자로 말고도 우리의 주변에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왔다는 사람들이 꾀나 많다.
아마도 가사(假死)상태가 아니었을까 짐작하지만 분명한 것은 알 수 없다.
의학계에 의하면 심장과 뇌의 활동이 멎는 시간은 약 8 분 사이라고 한다.
그 동안에 겪은 일들일지 모르나 각지에서 서로 다른 시간에 그들이 증언한 자료에 의하면 아주 공통적인 것이 있다.
영혼이 자신의 몸에서 떠나 나오는 모습을 스스로 느끼며 죽은 자신의 육신을 내려다 보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아주 짧은 시간안에 영화처럼 자신의 삶에서 저지른 죄악들을 모두 보고 알게 되며 그때 몹시 후회하며 슬퍼하는 마음을 갖게 되었다고 똑같이 말하고 있다.
단테도 그의 작품, (신곡,DIVINA COMEDIA)을 통하여 그가 죽음과 같은 상태에서 환상처럼 보고 돌아왔다며 지옥, 연옥 그리고 천국의 모습을 그리고 있는데 작품이라고 말하기에는 너무나 현실감있게 세세이 적고있어 읽고 있노라면 몸에 전울이 느껴진다.
단테는 무서운 지옥의 모습을 실제 물리적으로 존재하는 형태가 있는 것으로 그리는데 그것은 지금껏 이해하던 것에서는 생소한 것이지만 또한 공감되기도 한다.
세상 사람의 눈으로 영의 세계를 볼 수 없듯이 영혼들은 우리가 현세에서 보고 듣는 것처럼 그런 그들만의 실체 가 존재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육신을 가진 우리가 기쁨, 고통을 느끼듯이 영혼이 그런 기쁨이나 고통을 모른다면
그성이 오히려 모순이 아니겠는가?
거기에는 지옥에서 만난 유명인사, 성직자의 실제 이름까지 거명하고 있다.
그 끝이 없는 고통중에 있는 그들은 신음하면서, 또 연옥의 영혼들은 역시 고통을 겪으면서 단 한 푼의 빚(죄값)까지 다 갚기 전까지는 그곳에서 풀려나지 못할 것을 증언하고 있었다. 이 얼마나 무서운 증언인가?
(결론)
(어떻게 살아야 할까? 어떻게 죽어야 할까?)
어떻게 사는 일도, 또한 어떻게 죽는 일도 결국 각자의 의지의 선택이기도 하지만 신앙인의 필연이어야 할 길은 꼭 한가지밖에 없을 것이다.
예수께서 새로운 계약으로 우리에게 명하신 사명, 하느님을 사랑하고 (나)를 사랑하며 나의 이웃을 나처럼 사랑하며 살고 또 그렇게 죽는 것이 열쇠일 것이다.
그 안에서 살고 그 안에서 죽으면 더 이상은 바랄 수는 없는 좋은 곳에 살고 좋은 곳에 가서 또 살게 될 것인데 무엇을 더 바라고 또 무엇을 더 두려워 할 것인가?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사랑)의 극치는 이웃,벗을위해 나를 희생하는 것이다.
여기서 희생된 (나)는 이미 없어지고 죽은 (나)이므로 (나)는 (우리)를 이루게되고 그 현상이 거듭 확대 재생산되면 이 세상은 아가페의 사랑으로 쌓여 (희망의 보편성)에 이르게 될 것이다.
(희망의 보편성)에 이르게 됨은 곧 이세상의 현세에 유토피아적 천국을 이루는 것이라 말해도 무리가 이닐 것이다.
이런 일은 따로 떼어서 교회에 와 있을 동안에만, 또 특별히 정해진 날 동안에만 숙제처럼 할 필요도 없겠지만 또 그렇게 해서도 안될 것이다.
일상에서 내일 아침이 아니고 오늘 바로 지금 또그 다음의 지금에 실행할 일이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죽으면 살겠고 살고자 하면 죽을 것이다.” 고 하신 뜻이 이것 아닐까 가늠해 본다.
새로운 계약이 완성되는 그 길이므로 “하늘나라는 이미 네 마음안에 있다.”고
하셨을 것이다.
(지금까지의 저의 글은 죽음에 대한 저 개인적인 생각이며 희망을 말하고자 한 것일뿐 다른 이에게 제 생각을 전파하여 영향을 주려는 목적으로 쓴 것이 아닙니다.
글 중에 가톨릭교회의 가르침 과 다른 내용이 있다면 그것은 저, 개인의 생각이 모자라거나 잘못된 것이므로 교회의 가르침에 맞게 고쳐져야 할 것입니다.
또한 저 자신이 그렇게 살고 그렇게 죽고싶다는 희망은 있으되 실제 살아가는 모습은 희망과는 너무나 다른 부끄러운 모습임을 고백하는 마음으로 썼을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