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19일 연중 제 16 주일
농사나 텃밭을 조금이라도 가꾸어본 분들이라면 잡초 때문에 고생하실 것이다. 텃밭에 심어 논 오이, 고추, 상추를 지키려고 뙤약볕 아래서 허리 한 번 못 펴고 풀을 뽑다보면 “내가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자고 이 고생을 하나” 싶어 헛웃음이 나오기도 할 것이고, 뽑아도 다음 날이면 고개를 들이미는 잡초를 보면, 잡초가 없으면 농사지을만하겠다는 생각도 들 것이다. 그런데 사실, ‘잡초’라는 이름 자체가 사실 인간 중심의 이기적인 편견이라는 점이다. 아메리카 원주민들은 “세상에 잡초는 없다”며 모든 식물이 저마다의 쓰임새를 가진 신의 선물이라고 했고, 시골 할머니들은 뜯어서 맛보고 “음, 불쾌하지 않네?” 싶으면 다 나물로 무쳐 드셨다. 실제로 어제까지는 밭을 망치는 천덕꾸러기 잡초 취급을 받던 ‘쇠비름(장명채)’이나 ‘질경이(차전초)’가 오늘날엔 오메가-3가 가득한 귀한 약초나 웰빙 식재료로 환대 받는 걸 보면, 잡초와 약초의 차이는 그저 ‘인간이 그 가치를 언제 알아챘는가’의 시간의 문제일 뿐이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밀과 가라지’의 이야기도 이와 같다. 가라지는 밀과 아주 비슷한 모습으로 자란다. 하지만 추수 때가 되면 둘은 확연히 구분된다. 밀이 통통한 열매를 맺은 반면 가라지는 껍데기만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꾼들은 농사의 효율성을 따져 가라지를 뽑아버리자고 한다. 어린 곡식이 다치더라도 잡초를 없애는 게 맞다는 것이 우리 생각과 비슷하다. 당장의 결과만 보는 일꾼들과 달리, 주인의 마음은 다르다. “둘 다 수확 때까지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 두어라.” 주인은 당장의 청소보다 밀 한 알이라도 다치는 것을 더 걱정한다.
이 비유는 오늘날 우리가 모인 공동체, 심지어 종교 공동체 안에도 그대로 대입된다. 우리는 종종 교회나 좋은 모임에 가면 천사 같은 사람들만 있을 거라 기대한다. 그러다 누군가의 좋지 않은 모습이나 이기적인 행동을 보면 충격을 받고 “아, 여기도 똑같네.” 라며 실망하고 떠나버린다. 하지만 교회는 완벽한 의인들의 모임이 아니라, 하느님의 자비가 필요한 ‘죄인들의 모임’이라 하는 것이 더 맞다. 사람은 누구나 온전히 선하지도, 완벽하게 악하지도 않다. 오늘은 선하다가도 내일은 흔들리는 게 우리 인간의 모습이다.
좀 더 세밀하게 이 밀과 가라지의 불편한 동거는 공동체뿐만 아니라, 바로 내 마음속에서도 그래도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만약 내가 백 퍼센트 순도 높은 ‘밀’이라고 착각하며 산다면, 가라지를 그냥 두라는 주님의 말씀이 “저 나쁜 것들을 왜 당장 심판하지 않으시지?” 하며 삶은 고구마를 먹은 듯 답답하게 느껴질 것이다. 하지만 솔직히 우리 내면을 탈탈 털어보면 부끄러운 가라지(단점, 질투, 게으름)가 가득하다. 내가 가라지일지도 모른다는 겸손한 사실을 깨닫는 순간, “추수 때까지 일단 기다려줄게”라는 주님의 말씀은 숨 막히는 심판이 아니라, “휴, 살았다!” 하고 가슴을 쓸어내리게 하는 최고의 자비이자 기회이지 않겠나?
내 결점을 인정하지 않고 꽁꽁 숨기려다 보면, 그 결점은 가시가 되어 나를 찌르고 결국 타인을 비난하는 화살로 변하기 마련이다. “난 문제없어, 다 저 사람 때문이야!”라며 남 탓 만 하게 된다. 오죽하면 ‘내가 하면 로맨스 네가 하면 불륜’이라는 뜻의 ‘내로남불’이라는 말이 나왔을까? 그러니 내 안의 찌질함과 못난 모습(가라지)을 인정하고 나와 먼저 화해해야 한다. 그래야 “주님, 저 진짜 대책 없는 가라지네요. 도와주세요!” 하고 진짜 기도를 시작할 수 있다.
누가 선하고 누가 악한지 채점하실 분은 오직 하느님 한 분뿐이시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겉모습을 보지 않으시고 ‘내면’을 보시는 분이셨다. 당대 최고의 비 호감이자 세금 도둑이었던 자캐오에게서 뜻밖의 통 큰 관대함을 발견하셨고, 과거가 화려했던 막달라 마리아의 삶 속에서 세상 가장 순수한 사랑을 끌어내셨다. “내 지체 안에는 다른 법이 있어 내 이성의 법과 대결하고 있음을 나는 봅니다. 그 다른 법이 나를 내 지체 안에 있는 죄의 법에 사로잡히게 합니다.”(로마 7,13)라는 말씀처럼, 우리 속에도 선뿐만 아니라 악도 있다는 것을 겸허히 받아들이고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며 살아야 하지 않을까? 사실 예수님께서도 당신 자신을 선하다고 하지 않으셨는데(루카 18,19) 하물며 우리가 어떤 선의 잣대로 대상을 악으로 규정하며 살 수 있을까?
지금은 밀과 가라지가 사이좋게(?) 자라는 인내의 계절이다. 내 안의 부족함에 절망하지 않고, 이웃의 꼴 보기 싫은 모습도 “저 사람도 자라는 중이겠거니” 하고 받아쳐 주는 너그러운 마음이 필요한 때다. 세상이 아무리 엉망진창 같아도, 주님은 처음부터 우리 삶에 가장 좋은 씨앗을 뿌려두셨다. 비록 세상이라는 원수가 밤새 가라지를 뿌려놓고 갔을지라도, 결국 열매를 맺을 좋은 밀알이 훨씬 더 많다. 보통 세상은 가라지(잡초) 하나 없이 깨끗하고 완벽한 것만 ‘일등품’이라며 가치 있게 여긴다. 하지만 주님의 눈에는 약간의 약점이나 결점(잡초)이 섞여 있을지라도,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가진 모습 그대로가 세상에 둘도 없이 유니크(Unique)’하다. 세상에 그리고 우리 안에 또 내안에 밀과 가라지가 함께 자라고 있다. 우리를 향한 주님의 눈에는 이 모습 그대로 이미 충분히 아름답다. 최종적인 추수는 하느님께 맡겨드리고, 오늘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삶을 묵묵하고 충실하게 살아내면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