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날을 정월에, 그리고 섣달에도

5 월8 일. Mother’s day.

 

아들, 딸이 어쩌면 손녀와 손자였을지 어여쁜 아이들이 미사에 오시는 모든 엄마들께

가슴에 예쁜꽃을 달아드리며 ” Happy mother’s day to you. ” 그렇게 기쁘게 해 드리는

그 모습들이 또한 기쁘고 예쁘기만 해 보였다.

 

아마도 그리고는,

집으로 또는 식당으로 모시고 가서 맛나는 음식으로 대접해드렸을 것이다.

 

날씨마저 화창하고 그래서 오월은 기쁜날일까 보다.

 

덩달아 기뻐할 일 말고는 별볼일 없는 나는 집으로 오는 차 안에서 돈 안드는 상념들을 부풀려

그것으로 배도 채우고 머리도 채워본다.

 

5 월 8 일의 어머니날이 

6 월 8 일에는 어떤 모습이 되어 남아있을까 ?

아직도 아랫목엔 따스한 기운이 남아있겠지 ?

 

그럼, 

조금 건너뛰어 9 월 8 일에는 내년에 다시 꽃을 사러 꽃집에 들리게 될 그날을 기약하며

웃목까지도 이미 싸늘해진 모습으로 저만치 물러나 있을 것이란 나의 생각이 현실적 추정일 것이다.

 

나도 아이들과 신랑도 챙기며 내살림 해야하는 독립된 식구인데 

솔직히 어떻게 맨날 한결같이 노인아파트에 계시는 엄마곁에 머물러 있으란다면 무리한 청일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렇게 넉넉히 이해하면서도 한편 과욕이다싶을 희망을 걸어본다.

 

이렇게 하면 어떨까.

 

가령, 5 월치 달력의 8 일에 동그라미로 기억할 날로 표시하듯이 

정월부터 섣달에 걸쳐서 매달 8 일에 동그라미를 미리 표해서 꼭 기억하였다가

매일은 할 수 없는 어머니날을 그날 만큼이라도

 내가 어머니에게 해 드렸던 만큼 꽃( 마음의 꽃이면 어떤가, 진심어린 꽃이라면) 달아드리고 

좋아하시는 음식 정성껏 만들어 잡수시게 한다면 

지금도 기뻐하시겠지만 후일에 그렇게 해 드리려해도 곁에 더는 계시지않을 그날에

못내 두고 후회스런 마음은 조금 면할 수 있지 않을까 해서 청해 본다.

 

예 ?

이미 그렇게 하고 계신다고요 ?

아니 그보다 더 자주 모시고 있다구요 ?

 

아이구, 죄송해요. 

다른이도 저처럼 후회하며 사는 이가될까 싶었을 뿐이예요. 용서하세요.

 

 

                                                                                                      *   *

 

어머니날은,

나에게 생각을 건너뛰게 하여 일반적인 통념으로서의 이즈음의 여권신장(女權伸張) 과 그의 영향이 

우리의 교회인 신앙공동체에 미치는 변화가 있다면 어떤 모습으로 다가오고 있을까 에 이르게 하였다.

 

어쩌면 주제넘고 자칫 오류를 범하는 실수를 범할 수도 있다는 우려를 했음에도 공동체의 한 평신도로써

교회안에서 일어나고있을 수도 있을 중요 잇슈를 생각해 보고 또 생각에 따른 의견을 단순히 사견임을 전제한다면

말할 수도 있을 것이라 여겨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특히 여자수도회의 수도자는 신앙적으로 영적으로 우리에게 있어서

어머니이고, 누님이며 또 여동생이고 언니라 할수 있을 신앙공동체의 한가족이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가 직시하고 있듯이,

입센의 소설에서 숨 죽이며 거의 노예처럼 집안에 묶여 살아오던 노라가 ( 인형의 집)을 뛰쳐나간 그 이래

우리사회에서 여권은 성난 파도처럼 온사회에 걸쳐 크게 신장해 왔고 그래서 사회는 크게 변화하였다.

 

인격적인 면에서 남녀가 동등한 권리와 기회를 등분해야 한다는 의미에서 긍정적이며 기여하였다고 볼 것이다.

오히려 이제는 여성상위시대 라는 말이 어색하지 않을 정도로 많은 가정과 사회에서 대남성우위의 위치에 선 경우도

있을 것이지만 아직도 직업전선에서는 개선되야 할 면도 많을 것이다.

 

이런 사회적 변화는 

교회내의  한 축인 여성신도들에게도 많은 변화가 있었겠지만 

여기서는 생각을 함축하기 위하여 여성수도회문제로 제한하기로 해야겠다.

 

뉴스에 의하면 

지난 4 월에 교황청에서는 미국가톨릭여성지도자모임(LCWR) 의 대표들과 담당부서 대표인 뮬러주교와의 회담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많은 현안과 잇슈가 취급되었겠지만 

나의 생각과 결부시키려는 잇슈인 여성사제직에 관한 것만 따로 떼어 생각을 말해보았으면 싶다.

 

전에부터 기회가 있을때면 건의사항으로 떠오르던 문제가 프란시스코 신임교황님의 등장을 계기로 다시 부각되었던

것 같이보인다.

 

이 문제는 참으로 예민하고 또 중요하고 간단하지 못한 것임에 틀림없다.

나의 사견임을 다시 전제하면서 나의 생각을 말해보고 싶다.

 

여성사제직문제를 

일반사회의 여권신장에 영향을 받는 그 연장선상의 잇슈로 취급되는 것은 우선 옳아보이지 않는다.

왜냐하면 신앙공동체가 사회의 시대적변화나 그 영향에 의해서 피동적으로 따라 변화하게 된다면 잘못임이 틀림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사제수의 감소현상은 그 자체로 심각한 문제이어도 그것이 곧 여성사제로의 대체와 결부시켜야 하는 

대안이라 보기는 어렵다.

그것은 우리 신자들의 생각일뿐 그것이 하느님의 뜻과 일치하는지를 아는 것이 그에 앞서야할 것이기 때문이다.

 

 

사제직을 맡음으로서만이 대남성 우위를 점할 수 있다거나 아니면 반대로 열위에 머물 것이다는 생각이라면 

수긍하기 어려울 것이다.

왜냐하면

수도자직의 숭고한 의미와 신앙적가치를 스스로 손상할 수 있기때문이다.

사제직은 권위적인 측면에서만 바라볼 수 없기 때문이다.

 

수도자 고유의 삶.

얼마나 숭고한가.

기도, 봉사, 수도생활 그리고 교구에의 파견봉사는 얼마나 중요하고 반드시 있어야 할 다리(Bridge)의 역할 아닌가.

신자와 신자사이, 신자와 사제사이, 신자와 하느님간의 다리역할을 통한 봉사활동은 어쩌면 수도자만이 할 수 있을

특별하고 Unique position 일 것이다.

 

사제직을 男 權 에 대한 女權 의 도전이라는 의미라면 사제직의 그 신성성에 대한 모독이며 자칫 통속적 흑백논리

로 전락시키는 誤導가 될지도 모른다.

 

세상에서의 흑백논리는 얼마나 많은 잘못된 결과를 우리에게 안겨주었는가 ?

 

요즘 젊은이들에게 극심한 가치관의 전도를 물려준 것도 결국은 그것 때문이었을 것이다.

 

상대인 남자는 여자보다 반드시 큰키를 가져야 한다.

실은 키가 커도 작아도 그것은 각각 하느님의 축복일 수 있을 것이다.

 

자캐오는 키가 작음으로서 그리스도를 모시는 세리가 될 수 있었다.

다윗은 어쩌면 작아서 몸을 못가누는 거인, 골리앗을 물리쳤을지 모른다.

 

창조주 하느님께서 흙을 빚어 만드신 그릇의 크고 작음을 못 깨우치고

 많은 이가 공동체에서 머리만 되려하고 새끼손가락, 발바닥의 중요성을 잊어 공동체를 소란스럽고 혼란의 장으로

만드는 일이 얼마나 많은가.

  

그것이 사회를 살아가는데 꼭 필요하건 안하건  대학졸업장을 갖는 것은 기본조건으로 삼는다.

여자의 속은 어떻건 외모는 예뻐야한다는 가치관은 많은 젊은 여인들이 성형과를 거쳐 대부분 비슷한 용모를 갖는

모순을 형성하게 되었다.( 특히 한국의 경우)

그 겉모습을 좇는 풍습은 얼마나 짧은 혼인의 파경을 몰아왔는가.

 

자기 스스로 선택하는 피부색도 아닌 것을 그것으로 우열의 기준으로 삼아 인종차별을 하여 

차별하는 이도 차별 당하는 이도 모두  인간 스스로를 노예신분으로 타락시켰다.

 

재물의 소유 다과로 정해지는 불문율 같은 사회적신분이나 위신의 우열현상.

 

동성혼인, 낙태등 생명경시풍조는 그 극에 달한 느낌이 들 지경이 되었다.

 

이러한 세상의 모순은 그대로 여과없이 교회공동체로 스며들어오고 있다.

 

이 모순 가운데서 수도자는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맡아 하느님이 너무나 기뻐하실 일을 찾고 또 수행할 수 있을까.

 

신앙공동체에서,

모두가 사제일 수 없고 모두가 수도자일 수 없고  모두가 평신도일 수 없듯이

모두가 주어진 일에서 하느님의 뜻을 찾고 그일에 몰두한다면 공동체는 초심으로, 초대교회의 모습으로

되돌아갈 수 있을 것이다.

 

수레바퀴를 이루어 굴러가기 위해서는

각각의 부품들이 제자리에 잘 맞게 들어가 제 역할을 잘 담당할 수 있어야 한다.

부품들 그 자체가 아무리 우수한 품질에 훌륭하다 한들,

똑같은 부품들만 불균형하게 구성되어 있다면 수레바퀴가될 수 없을 것이다.

 

여성수도자문제 같은 중차대한 일을 나같은 잘 알지도 못하는 자가 함부로 말할 사안도 아닌줄을 알면서도 

이렇게 잘뭇을 범하고 있는 것은 어쩌면 역설적으로 그일이 너무나 중차대하여 나같은 평신도에게 마저

염려스럽게 중압감으로 다가오기 때문일지 모른다.

 

무엇보다도 중요하고 지나칠 수 없을 일은 

하느님의 뜻이 어디에 있을까를 찾아내는 일일 것이다.

 

사람의 생각만으로 정할 사안은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여성의 인권이 무시당하고 남성우위의 시대였던 그 시대,

예수님시대에 누구보다도 여성을 사랑하셨고 대우하셨던 그리스도께서

직접 뽑아 세우시고 공생활 내내 함께하셨던 사제단, 또 베드로 위에 사제권을 일임하신 예수님의 뜻은

어디에 있었을까 ?

 

하느님이신 예수께서 

당시의 시대상에 영향을 받으시고 그에 따라 하셨을까 ?

 

곰곰이 생각해 보고 따져볼 대목일 것이라 생각한다.      

 

 

 

 

creation 002.jpg 

 

 

 

 

                      

목록

'자유' 게시판 최근 글 목록

제목
작성자
날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