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 푸를 것만 같았던 여름의 나무들도
이제 그들의 때를 알아차리고 온갖 색갈로 그 옷을 갈아입고 있음을 우리는 본다.
그러나 그렇게 하고 가지에 붙어있는 잎새들도 이제,
또 다른 그들의 때를 만나면 하나씩하나씩 자신을 키워주고 먹여주었던 그 나무의 가지들과
헤어져
그들의 고향이었던 땅으로 되돌아가기 위해 아래로 뛰어내릴 것이다.
우리네 사람들도
계절이 바뀌고 서늘해지자 바꾸어 입을 두터운 옷들을 꺼내서 손질하고 그래서 아마도,
여름내 한가했다던 한인들의 세탁소도 많이 바빠져서 카운터에서 돈을 꺼내
세는 소리가 밖에까지 들릴지 모른다는 희망을 갖게한다.
그런 가운데서도 이곳 현지 사람들중에는
추운 날씨에도 여전히 짧은 옷소매에 반바지로 활보하는 이도 있고 더운 여름에도
두터운 옷을 입고도 무표정으로 즐기는 이도 보게된다.
그들을 보면서 생각하게된다.
때를 모르는 것일까, 아니면 알아차리는 Sensor 에 문제가 생긴 걸까?
자연은 그 때를 잘 마추어 사람에게 보이며 똑똑한데 자연을 관리할 권리와 책임도 맡겨진
모든 것의 영장인 사람은 그 자연보다도 덜 똑똑해 보이기도 하는가.
때에 맞추어 갈아입는 일만을 말하려는 게 아니다.
성경의 집회서는 어떻게 자연은 똑똑할 수 밖에 없을지를 알려주고 있다.
” 그분께서는 서리를 소금처럼 땅에 뿌리시고 나무 끝에 얼음꽃을 피우신다.
북새풍이 차갑게 불어오면 물위에 얼음이 언다.”(집회 43:19)
그러고보면 하느님께서 자연과 함께 하시니 그 자연은 때를 알게되는 가 본다.
만물의 영장되기 위하여 창조되었으면서도 사람이 하느님과 함께 하지 않는다면 그는,
그 때를 잘 알아차리지 못하게되는 것 같다.
지혜서, 코헬렛에 보면,
모든 것에는 때가 있다. 또 모든 일에도 때가 있다.
” 심을 때가 있고 죽일 때가 있으며 고칠 때가 있으며 지을 때가 있다.
간직할 때가 있고 던져 버릴 때가 있다.
침묵할 때가 있고 말할 때가 있다. “( 코헬3장 )
Shopping mall에 들어섰을 때 언뜻 어느쪽으로 가야 내가 원하는 상품을 취급하는 상점으로
헤메지말고 곧장 갈 수 있을지 난감할 경우가 있다.
그 때에,
안내표지판 앞에 서면 그곳에는 화살표로 한곳을 지정해 주면서,
” 당신은 지금 여기에 서 있습니다.( You’re here)”
그런 친절한 안내를 만나면 방황함이 없이 바로 갈 수가 있게된다.
신앙생활을 함께하고 있는 우리들은 지금,
어쩌면 하나의 큰 전환점을 맞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하게 된다.
여러 교우들이 염려스런 마음으로 그와같은 말을 나누는 것을 듣게되기 때문이다.
왜 그런 말들을 이 시기에 서로 나누게되는 것일까?
지금이 바로 함께 한 공동체에서 신앙생활을 하면서 함께 그런 생각들을 하게끔 된
그 때라고 생각하기 때문일까?
샤핑몰에 가서 안내판에서 본 것처럼 신앙생활 중에서 (내)가 지금 어디쯤에 서 있는 것인지를
한번 되돌아 보아야 할 필요를 느끼게돼서 일까?
노파심이였으면 하는 바람이 있으면서도
한편, 혹시라도 신앙적으로 방황하게 되는 경우가 생긴다면 어쩌나 그런 염려가 생기는 것도 사실이다.
자연의 현상들 처럼,
외적 변화요인이 내부에 영향을 미칠 수도 있고 안의 요인이 외적으로 기대와는 다르게
작용할 수도 있을 것이다.
내가 바란다고 해서 그것이 좋은 것도 아니며 또 나쁜 것도 아니다.
마찬가지로
내가 원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것이 곧 나쁜 것도 아니고 쫗은 것도 아니다.
신앙의 문제가 특히 그렇다.
다만 오직 그 주인이신 하느님과 내가 그 생각과 말과 행동이 함께 하며
하느님 안에서 하느님을 통 할 그 때만이
우리는 그것이 좋고 바르다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양은 풀을 먹고 산다.
양을 하느님의 풀과 물이 있는 시냇가로 바로 안내하는 이를 만나면 양은 기뻐할 것이다.
주인께 다가가는 길이기 때문이다.
물고기는 눈을 뜨고 잔다.
무엇이 불안스러워서 일까. 아니면 그럴 일도 없는데 그저 그러는 걸까?
유혹은 어디에나 있고 언제나 있었다.
신랑을 기다리는 동안 나의 등잔에 넉넉한 기름을 준비하고 있다면 무엇이 두려우리.
무슨 이유로 낮에도 눈을 뜨고 밤에도 눈을 뜬 채 자야 하리.
요즘에 나쁜 이들이 음식에 방부제를 많이 섞어 내다 팔며 돈을 버는 걸 보며 생각하게 된다.
왜 사람들은 썩지 말아야할 것은 썩게 만들고 막상 썩어져야 할 것은 썩지 말기를 바라는가 ?
여기 이 말은 나에게 다시 한번 돌아보게 하는듯 하다.
시장에 가서 과일진열대 앞에 가면, 또는 다른 지역에서 만들어진 상표의 식빵들 또 야채들…
모두가 어제 밭에서 캐온것처럼, 바로 오늘 만들어져 배달된듯, 모두 싱싱하지 않은가.
그렇지 않다면 왜 ? 어째서 소매점으로 배달된지 제법 지나고 장을 봐와서 내집의 식탁에 놓여지고도 한참 그리고 한참이나
지난 것들이 아직도 싱싱한 채 나를 올려다 보며 앉아있지않은가?
마치, 헤이, 머해 뭘 망설여. 어서 드시라니까 아 머해여!
이것들 정말 해치워야 하나 아니면 기권하고 말까? 헷갈리게 하네?
생산지에서 나온지 열흘, 보름… 이러고도 싱싱하지 않고 상하거나 썩지않는다면
반가운 것인가, 의심해야 옳은가 의심많은 나는 사뭇 헷갈리네요.
땡의 소출인 야채, 과일등은 얼마큼 후엔 상하거나 썩어야 그게 마땅하고 옳은 건데 뭔일이래요?
그러면 농장도 빵공장도 또 시장도 망하게 생겼는데 그것들을 그냥 둔답니까?
참으로 야단났네요. 그런 방부제, 화공약품 잔뜩 멕인것들을 나의 몸안으로 배달했다간
병원응급실로 앰불런스가 나를 배달 안한다고 어떻게 장담하나요/
그건 그렇다 치고, 눈에도 안보이는 나의 영혼이 상하거나 썩으면 이건 도 어찌 감당할까요.
노랫말에, “늦기 전에 늦기 전에 빨리 돌아와주오… ” 그런것이 생각나네요.
누구애게 말하기 전에 바로 (나)가 참말로 걱정이네요.
미루다가 그때가 되서, ” 넌 그때 어디 있었느냐? 뭘 했냐구… ”
서둘러야지 은근히 걱정이고 야단이네요. 내가 날 재촉해야겠어요.
어쩌면 우리는 사뭇 다른 시기에 사뭇 다른 환경을 겪고 있을지라도
데자부 (Dejabu) 현상처럼 전에도 우리가 홍역처럼 겪었던 일을 연상하며 지레 겁을 먹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위기란 언제나 또 다른 기회를 가져다 준다.
좋았던 시절이 나쁜 것을 가져올 수도 있듯이 어려운 시절은 더 좋은 내일을 예고할 수도 있는 것이다.
좋은 것을 기대하였으나 오히려 기대 이상으로 더 나쁜 것이 찾아올지도 모른다.
우물에 빠졌던 늙은 당나귀처럼, 우리는 그 당나귀 처럼 지혜를 구하자.
늙어 별 쓸모가 없게 된 그가 우물에 빠지자 이제 건져내도 소용이 없게된 걸 알게된
동네 사람들이 아예 묻어버리려고 삽으로 흙을 쏟아 내리자 그 나귀는 그 흙들을 받는대로 자꾸만
아래로 밀어내어 우물이 흙으로 메워지자 죽은줄 알았던 그 나귀는 밖으로 걸어나와 살아났었다.
패배자는 망할 생각만 하다가 망하고 말지만 희망을 놓지않는 이는 빛을 만나고야 말 것이다.
사람의 삶이란 새옹지마(塞翁之馬) 이다.
사람에게 의지하지 말고 주인에게 의지하자.
함께 하느님께 기도하며 그 하느님께 간구하면 우리를 좋은 곳으로 인도해 주실 것이다.
우리가 하느님의 백성이고 교회가 하느님의 성전이기 때문이다.
물의 흐름을 보면서 그의 겸손을 따라 배우며 살고 싶었다.
얼마나 겸손한 물인가.
더 이상은 내려갈 곳이 없는 곳까지 흐르고 바닥을 차지한다, 그래서 바다를 이룬다.
마음이 가라앉고 이제는 더 이상 내려갈 곳이 없어보였을 때,
눈을 감고 손을 모아 가슴에 얹고는,
Amazing grace 를 불러보고 그리고 나서
How great thou art 를 불러본 적이 있었다.
얼마나 가슴이 트이고 눈에서는 물이 흐르고 감사하는 마음이 됐었는지.
”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와…….
I was blind but now I see. “
” 주 하느님 지으신 모든 세계, 내마음 속에 그리어 볼 때…
I see the stars I hear rolloing birds sing sweetly in the trees…
내 영혼 주를 찬양하리니 주 하느님 크시도다. How great thou art. ”
아멘, 아멘, 아멘 !
Would you like to try it someday too ?
Ya, Why not ?
You’re going to see what I meant, for su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