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옛날이여!

 

 

 

 

 

아 옛날이여!

 

 

얼마 전 한국에 있는 후배 신부에게서 카톡이 왔습니다. 인터넷에서 우연히 나를 보게 되었는데, 너무 늙어 보이니 옛날처럼 머리에 염색도 하고 멋있게 살라는 말이었습니다. 걱정하는 것은 좋은데 늙었다는 말이 은근히 거슬렸습니다만, 농담하듯 '가는 세월 그 누구가 막을 수가 있나요' 라는 노래가사를 답신으로 보냈습니다.

 

오늘의 복음 말씀은 예수님께서 거룩하게 변모하신 이야기 입니 다. 예수님의 거룩한 예루살렘을 향하는 여행 중에 일어난 일입니다. 예수님의 수난과 부활에 관한 첫 번째 예고 (마태 16, 21 -23)와 두 번째 예고 (17, 22-23) 사이에 놓여 있는 오늘 말씀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셔야 하는 참된 의미와 제자들이 가져야 할 신앙이 무엇인지 가르치십니다.

 

성서 안에서 ‘높은 산’은 하느님의 현존의 표시입니다. 예수님은 그곳에 “베드로, 야고보, 요한만을 따로 데리고” (17, 1)가시어 영광스럽게 변모하십니다. 이때 “해처럼 빛나는 얼굴”과 “빛처럼 하얘진 옷”(2)은 지상의 것과 확연히 구별되는 천상적인 것입니다. 즉,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계시지만 동시에 천상적인 분이라는 사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런 예수님의 변모에 대한 확증은 두 가지로 나타나는데, 첫 번째로는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 예수님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시는 것입니다.” (3) 율법의 창시자 모세와 그 삶의 실천을 촉구하던 예언자의 대표로 엘리야가 나타나 예수님과 대화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하늘나라의 복음을 완성하러 오신 분이며 부활의 영광을 입으실 분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루카복음에는 변모된 예수님과 모세, 그리고 엘리야가 “예루살렘에서 이루실 일, 곧 세상을 떠나실 일을 말하고 있었다.” (9, 32)고 합니다. 그 전에 카이사리아 필리피 지방에서 베드로는 내가 누구냐라는 예수님의 질문에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라 고백했습니다.(마태 16, 16) 그런 분께서 수난과 죽음을 통해 부활한다는 것은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였을 겁니다. 그런 이들에게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는 부활하신 후 예수께서 누리실 참된 모습을 제자들한테 미리 보여주는 사건이 아니었겠습니까?

 

그러나 베드로는 예수께서 이루셔야만 하는 일보다 그분의 영광스러운 모습에 매료되어 “저희가 여기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원하시면 제가 초막 셋을 지어 드리겠습니다.”(4)라며 예수님을 붙잡습니다. 기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초막이라 함은 의인들이 하느님께 받는 영원한 거처를 말합니다. 그러니 엄밀한 의미에서 초막은 제자들이 예수님께 지어 드리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장차 이루실 일을 통해(16, 21) 우리를 위해 지으실 초막이어야 합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인간적인 모습에서 보면 베드로가 산 아래로 내려가지 말고 여기서 지내고자 한 것은 주님의 이런 영광스런 모습이 너무 반갑고, 행복해 영광을 얻기 위해 겪어야 할 어려움의 여정을, 울음의 여정을 생략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런 베드로를 달래시며 산 아래로 데려 가십니다. 산 아래는 바로 고난과 어려움이 기다리고 있는 세상이며, 그들이 장차 도달할 예루살렘은 고난과 영광이 함께 존재하는 곳입니다. 예수님은 영광을 얻기 전에 반드시 겪어야할 여정으로 제자들을 이끌고 계십니다.

두 번째는 “구름 속에서” 들려온 말씀입니다. 하느님의 현존을 드러내는 구름 속에서 들려온 말씀은 예수님을 “내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 로 계시하는 한편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17, 5)하시며 '그가 하는 말을 들어야 하는' 예언자로 계시합니다. "구름 속에서 들려온 말씀"은 주님을 따르고자 하는 모든 이들에게 주님의 말씀을 명심하여 하느님의 뜻을 실천 할 것을 명령하시는 것입니다. ‘구름’ 속에서 들려온 말씀은 제자들을 통해 ‘군중’ 한테 그리고 이 복음을 듣는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따로’ 데리고 높은 산에 오른 세 명의 제자들은 영광스럽게 변모된 예수님을 목격하는 행운을 잡았습니다. 그 행운 안에는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극복하고 전해야 할 신앙과 예수님의 변모 사건을 “사람의 아들이 죽은 이들 가운데서 되살 아날 때까지”(9) 함구해야 하는 의무가 함께 부여되었습니다. 예수께서 함구령을 내리시는 까닭은 메시아는 지금의 영광에 머물지 않고 수난과 죽음의 고통을 넘어 부활로 그분의 계시를 완성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놓고 보자면 예수께서 오르신 “높은 산”(1)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들이 몰려올 종말론적 산인 동시에 우리가 가야 할 골고타를 말씀하시는 것도 됩니다. (마태 27, 33; 이사 2, 2-3 참조)

 

거룩한 것을 체험하면 사람들은 거기에 압도되어 두려움에 사로잡힙니다. “소리”를 듣고 “얼굴을 땅에 엎드린 채 몹시 두려워 떠는 제자들”(6)에게 “예수님께서 다가오시어” 다정히 손을 대시며, “일어나라, 그리고 두려워하지 마라.”(7)시며 격려하고 계십니다. 두려워하는 사람들에겐 십자가는 더 무겁고 무섭게 다가올 것이기 때문입니다.

 

“일어나라, 그리고 두려워하지 마라.”(17,7) 하시는 당신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며, 세상이 주는 안락함에 주저앉으려는 우리의 나약함을 떨쳐내야겠습니다. 진정한 기쁨과 영광은 오늘 우리가 짊어진 십자가 뒤에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아무런 고통 없이, 아무런 노력 없이 얻어지는 것은 유혹의 밑밥입니다. "주님, 저희가 여기서 지내면 좋겠습니다."하던 베드로의 유혹에서 “하느님 힘에 의지해 복음을 위한 고난에 동참 하도록”(II 티모1, 8) 불린 사람이 그리스도인 이라면, 주님의 고난에 동참함은 우리가 지닌 특권이 되며 신앙이 되기 때문입니다.

 

늙어가지 않고 변하고 싶지 않아도 시간은 사람을 늙어가고 변합니다. 우리의 외모도, 지위도, 권력도, 모두 변합니다. 하지만 그 변모의 모습이 거룩한지는 의문입니다. 주님의 영광스러운 변모를 통해 영원의 아름다움과 영광을 보지만, 그 전에 우리는 골고타로 먼저 향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골고타의 죽음을 통해 영광스런 부활에 이르셨듯 우리의 삶 안에서 깎아내고 잘라내는 골고타의 고통을 외면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의 몸은 쉴 틈 없이 늙어가지만 우리의 영혼이 십자가 위에서 쉴 틈 없이 젊어간다면 우리는 지금 영광스럽게 변모하고 있는 중일 겁니다.

 

 

                                                                                                                                   – 김 두진(바오로)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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