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 당신의 쉴 곳 없네. 내 속엔 내가 어쩔 수 없는 어둠 당신의 쉴 자리를 뺏고, 내 속엔 내가 이길 수 없는 슬픈 무성한 가시나무숲 같네.” 생각할수록 내 안에는 많은 내가 있습니다. 어떤 때는 선하기도 하고, 어떤 때는 악하기도 합니다. 순수하고 감성적이기도 하고, 교활할 때도 있습니다. 천사의 얼굴로 살기도하고, 때로는 끔찍한 악령의 모습으로 살기도 합니다. 언제라도 하느님을 만나 뵈올 수 있을 정도의 깨끗한 영혼을 유지하기도 하고, 하느님이 두려울 만큼 죄 짓고 살기도 합니다. 이렇게 많은 모습이 내 안에 있어 방황하고 괴로워하고, 또 다른 나와 싸우며 사는 것이 신앙생활이 아닐까 싶습니다.

 

오늘 복음 말씀은 유대인들이 하느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모이는 회당에서 벌어진 사건입니다. 그 곳에서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 이’

예수님을 보자 소리를 지르며 고백합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함구령을 내리면서 그 더러운 영을 그 사람에게서 쫓아내시자 그 사람은 나았다고 전합니다. 마르코 복음서는 이 이야기를 통해 더러운 영이 지배하던 세상에 하느님이 보내신 예수님이 오셨다고 전합니다. 사람들은 그분을 알아보지 못했지만, 더러운 영은 이미 알고 있습니다.

이제부터 예수님이 계신 곳에는 사람들이 더러운 영의 지배를 받지 않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도 세례를 받을 때(하느님의 자녀로 입적하면서) 하느님이 아니면서 사람을 지배하는 모든 것을 끊어버리겠다고 약속 하였고,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가 되겠다 약속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더러운 영에게 함구령을 내리십니다. 마르코복음서는 함구령을 자주 언급합니다. 더러운 영들에게, 혹은 기적적으로 치유된 이들에게, 또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함구령을 내리십니다. 마르코 복음서에서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들, 메시아 혹은 거룩하신 분 등, 신앙고백의 성격을 지닌 말을 할 때마다, 예수님이 함구령을 내리신 것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숨을 거두시자 백인대장으로 하여금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드님”이라 고백하게 합니다. 즉, 십자가의 죽음을 모르면서, 예수님에 대해 올바른 신앙고백을 할 수 없다는 것 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올바른 인식은 십자가의 죽음을 올바로 이해할 때, 가능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 복음서는 십자가를 포함하여 예수님을 인식해야 하고, 그 인식을 기반으로 그분을 하 느님의 아들이라 고백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예수님의 삶을 요약하는 상징입니다. 사람들을 살리는 일에 당신 스스로를 내어주고 쏟으신 결말이 십자가였습니다.

마르코복음서는 그 사실을 모르면, 예수님에 대해 말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하는 것은 십자가까지 이르른 그분의 삶이, 하느님의 생명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 주었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지대한 관심을 보이는 문제들은 생로 병사가 아닐까 싶습니다. 사는 것, 늙는 것, 병듦, 그리고 죽음, 인생의 네 가지 현실입니다. 그것은 인간이 대단한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는 일들이지만, 알아들을 수 없는 신비가 가득하고, 앞서 말한 번뇌의 원인이 됩니다. 불교에서 석가 세존으로 추앙받는 싯달다 태자가 일찍이 왕위를 버리고 출가 하여 수도를 시작한 것도 이 네 가지 번뇌를 해결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세상에 수만 가지의 종교들이 생겨나고 번창하는 것도 바로 이 네 가지에 대한 해답  때문일 것입니다. 사람들은 해와 달에게 빌기도 하였고, 정화수를 떠놓고 정성을 바치기도 합니다. 모두가 이 불가 사의한 주제들에 대한 해결 혹은 극복을 원한 것입니다.

 

그리스도 신앙은 예수님 혹은 하느님을 믿어서 인간이 더 잘 살 수 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신앙은 더 많은 재물과 더 존경스런 지위를 얻도록 해 주지 않습니다. 어쩌면 이런 것은 사람들이 하느님을 생각하며, 품었던 염원이겠지만, 그 염원은 인간을 자유롭지 못하게 하는 더러운 영에서 오는 것일 뿐입니다. 그런 염원을 성취해주는 것이 신앙이라 가르친다면, 예수 귀신의 힘으로 팔자 좀 고쳐보겠다는 사람들의 허망한 염원일 뿐, 사람들을 죽게하는 악으로 가득찬 신흥종교의 모습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십자가에 돌아가신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들이라 고백합니다. 생로병사의 인간 현실을 살면서 이웃을 보살피는 섬김을 위해 당신 스스로를 내어주고 쏟은 예수님입니다. 그분의 실천에서 참다운 인간의 자유를 읽어내고, 그것을 배우는 그리스도 신앙입니다. 그것이 재물이든, 지위든, 자기 한 사람 잘 될 것을 약속하는 더러운 영을 쫓아내는 곳에, 예수님이 가르친 하느님의 생명을 사는 신앙의 길이 있다고 합니다. 오늘 복음에 회당에 모인 사람들은 ‘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이라 말합니다. 하느님의 생명이 하시는 일을 실천하며 살아, 그분의 자녀 되게 하는 ‘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이라는 고백입니다.

 

내 안에 내가 너무도 많습니다. 나의 내면 안에 분명하게 악으로 기우는 힘이 있습니다. 악령은 타락한 하느님의 영입니다. 모든 짝퉁이 그렇듯, 겉은 그럴싸합니다. 지식으로는 천사의 지식도 있고, 마음으로는 하느님을 알아보는 식별력도 있습니다. 그러나 더러운 영의

목적은 하느님의 생명에로 가지 못하게 합니다.

또한 세상에는 악으로 인도하는 흐름이 분명히 있습니다. 그 세력이야말로 이 시대 악령입니다. 성령에 반대되는 악령, 불결한 영, 사악한 영입니다.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드님으로 고백하는 우리가, 새롭고 권위있는 가르침을 받은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 지혜를 오늘 복음은 말하고 있습니다.

 

더러운 영의 고백이긴 하지만 우리도 이렇게 고백합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 김 두진(바오로)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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