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살아 계신 하느님의 성전입니다.
"사람아 너는 흙에서 왔으니 흙으로 돌아갈 것을 생각하라."
머리에 재를 받은 것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3주가 되어갑니다. 오늘 요한복음은 예수님의 열정적인 ‘성전 정화’ 사건을 전해줍니다.
공관복음에서 성전 정화 사건이 예수님의 공생활 후반부,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후의 일로 소개되지만, 요한복음은 이 사건을 예수님의 공생활 시작에, 즉. 가나에서 물을 포도주로 바꾸신 첫 번째 기적을 일으키신 후에 일어난 일로 전합니다. ‘성전 정화’ 가 예수님과 유다인들의 갈등이 시작되는 출발점입니다.
예수님은 이 사건으로 유다교의 지도자들의 관심을 사게 되고, 그 이후에 안식일과 관련된 여러 사건들을 통해 갈등은 조금씩 커졌을 것입니다. 요한복음에서 예수님과 유다인의 지도자들의 갈등이 극에 달하는 것은 ‘라자로의 소생 사건’입니다. 이때 유다교의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죽이기로 작정 합니다. (요한 12,10)
이스라엘 백성의 조상들이 400년간 종살이하던 이집트 땅에서 탈출하여 해방된 것을 기념하는 파스카 축제는 오늘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하느님과 함께 홍해를 건넌 이스라엘은 그들과 함께 하시는 하느님을 체험합니다. 하느님께서 시나이 산에서 모세에게 계시하신 십계명은 공동체를 이루어 사는 이들이 질서와 평화를 유지하고 자유와 책임을 다하겠다는 하느님과의 약속이었습니다. 함께 하시며 생명을 주시고 돌보아 주시는 하느님이 그들에게 잊혀지면서 종교가 의식화되고 조직으로 커지면서 성전은 장사꾼의 장터로 타락하게 됩니다. 유대인들은 유월절이 되면 예루살렘의 대성전으로 순례해야 합니다. 따라서 유월절을 전후로 예루살렘 대성전 일대는 어마어마한 군중들이 모이는데, 이때를 놓치지 않고 대사제들과 유대교 고위층들은 환전상들과 상인 등과 결탁해 순례 온 유대인들의 돈을 뜯어냈습니다.
성전에서 사용하는 화폐가 문제의 시작입니다. 그 시대에 로마 제국에서 통용되는 동전에는 로마 황제 초상이 새겨져 있어 성전에서 사용할 수 없었습니다. 따라서 성전에서만 사용할 수 있는 특별 화폐를 만들어서 참배를 하는 사람들에게 환전을 해 주 는데, 정당함이 아닌 폭리를 취했답니다. 또 대성전에서 바치는 예물도 문제였는데, 유대교의 의식에서는 희생제사가 중요하기에 희생제물은 매우 중요합니다. 제물이 흠없다는 것을 판정하는 사람이 대제사장들입니다. 그러나 대제사장들과 상인들이 결탁해서 순례자들이 직접 희생제물을 준비해 오면 "흠이 있으니 바쳐서는 안 된다."며 성전에서 파는 희생제물 만을 사도록 했습니다. 이렇게 환전하고 장사하던 곳이 성전 바깥이 아니라 예루살렘 대성전의 뜰이었으니, 소란함과 분주함 그리고 동물들의 배변, 울음소리, 성전이 아니라 시장통보다 더한 난잡함에 예수님의 분노는 의노였습니다.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마라."시며 채찍을 휘두르시는 모습은 제자들에겐
"당신 집에 대한 열정이 저를 집어삼킬 것입니다."는 성경 말씀이 기억 될 만큼의 열정이었습니다.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는 말씀을 “예수님께서 죽은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신 뒤에서야, 알아듣게 되었다는 제자들의 모습에서 복음은 예수님의 부활 사건 이후에 쓰여졌으며 복음의 말씀은 단지 예수님의 공생활의 일들만 전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수난과 부활을 체험할 때 비로소 예수님께서 하신 모든 일들의 의미를 알아낼 수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언급하시는 성전이 당신 몸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이들에겐 성전 정화의 사건이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암시하는 것이라는 사실도 알아듣게 합니다.
사순 시기는 정화의 시기이며 회개의 때입니다. 오늘 성전을 정화하시는 예수님의 열정에서 우리의 정화를 기억합니다. 우리가 살아계신 하느님의 성전임을 고백한다면 우리를 먼저 정화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마라." 예수님의 일갈처럼 먼저 장사꾼의 마음부터 없애야 합니다. 밑지고 파는 장사꾼이 없듯, 신앙의 모든 행위가 내 이익만을 추구한다면 그 신앙은 틀림없는 장사꾼의 신앙입니다. 하느님의 공동체인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며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교회는 '하느님의 집'입니다.
그분의 몸인 성체를 모시는 하느님 백성들의 몸도 성전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공동체를 성령께서 거처하시는 성전이라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몸은 성령의 성전입니다. (1코린 6,19)
기도하는 집이란 예수님의 표현은 우리 안에 거처하시는 성령을 기억하게 합니다. 성령의 자유로움이 우리의 욕심으로 막혀있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들은 십계명은 우리의 모습을 다시금 생각하게 합니다. 십계명은 말 그대로 계명입니다. ‘함께 살아가기 위한 가르침’입니다. 하느님과 함께 머물 수 있는 가르침과 나와 관계 맺고 있는 이들과 더불어 살아가도록 하는 가르침입니다.
모세와 이스라엘이 종살이 하던 이집트를 탈출하며 겪었던 함께 하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더불어 살기 위한 계명입니다. 딱딱한 말로 표현되어있지만 그 내용은 우리의 신앙 생활과 신앙인으로서의 삶을 돌아보게 합니다.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신앙생활은 바로 이를 실천하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하느님만 사랑하는 것도 또 이웃만 사랑하는 것도 올바를 신앙이 아니다. 우리의 부족한 부분을 채우는 것 우리가 사순시기 동안 해 야 할 정화이고 회개지 싶습니다.
우리가 살아계신 하느님의 성전이라면 오늘 채찍을 드신 열정의 예수님을 만나야 할 것 같습니다.
– 김 두진(바오로)신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