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 부활하셨습니다. 알렐루야, 알렐루야, 알렐루야!!!
어제 성 토요일 부활성야의 전례에서 우리는 "그리스도는 우리의 빛"이라 고백했고, 그 빛을 따라 살수 있도록 만드신 하느님께 감사했습니다. 태양이 떠오르면 밤의 어두움이 걷히듯. 주님의 부활이 우리를 어둠에서 빛으로 이끌어 주십니다. 우리에게 새로운 영과 새로운 기운을 주시는 분은 우리를 위해서 죽으셨지만 부활하신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따른다면 우리들 역시 죽더라도 다시 살아날 것입니다. 그것이 신앙의 신비요, 우리의 믿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그분의 말씀, 표징, 삶이 우리들의 삶과 믿음 안에서 기억되고 있는 것입니다. "너희는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라"는 말씀은 주님께서 우리게 주신 말씀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그분의 삶과 말씀 그리고 표징을 우리의 삶 안에서 기억하고, 실천하지 않으면, 우리가 매 미사때 마다 고백하는 주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실천하지 못하게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마리아 막달레나는 돌아가신 예수님의 시신에 향료를 바르려고 그분을 찾아 나섰습니다. 하지만 살아계신 분을 죽은 이들 가운데서 찾으려 했기에 그분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이어 제자들에게 무덤에 시신이 없음을 알리고 사랑 받았던 제자와 베드로는 무덤으로 달려갑니다. 사랑 받았던 제자는 젊은 요한으로 생각됩니다. 그는 수의를 보았지만 들어가지 않고 뒤 늦게 도착하는 굼뜬 베드로와 함께 무덤에 들어가 아마포와 수건을 통해서 직감으로 주님의 부활의 표징으로 보고 믿게 됩니다. 예수의 시신이 무덤에 없다는 사실을 두 제자에게 알린 막달라여자 마리아는 예수님의 부활을 믿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단지 예수님의 시신이 없어졌다는 놀라운 사실을 제자들에게 알리고자 할 따름이었습니다. 부활을 믿는 다는 것은 이래서 어렵습니다. 부활의 체험이 있어야만 부활을 믿을 수 있게 됩니다.
우리가 지식을 습득하는 데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지만, 습득된 지식이 진정으로 내 것이 되려면 체험해서 알아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머리에 있는 지식이 마음으로 내려 와야 한다는 말 처럼 우리가 이 부활을 체험하지 못하면 우리는 부활 그저 말로만, 또 안 믿으면 구원을 받지 못하니까 마지못해 믿으려는 소극적인 믿음을 가질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사실 오늘 이 요한복음은 매우 극적으로 표현되어집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무덤 입구의 돌이 치워져 있는 것을 보았고, 애제자인 요한은 무덤 안에 놓인 아마포를 보았으며, 베드로는 아마포와 수건들을 봅니다. 이렇게 보는 것을 드러냄으로써 요한복음 사가는 부활은 체험되어야만 알아들을 수 있는 신비라고 말합니다.
오늘 제 1독서에서 하느님께서 미리 증인으로 선택한 이들에게 돌아가신 주님께서 나타나셨고 그분꽈 함께 먹기도 하고 마시기도 하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 일을 모든 백성들에게 선포하고 증언 하라고 분부하셨다고 말합니다.
오늘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의 말씀이 우리게 일침을 가합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으니, 저 위에 있는 것을 추구하십시오. 위에 있는 것을 생각하고 땅에 있는 것은 생각하지 마십시오. 거룩한 것들을 생각하고 속된 것들에게서 떨어져 있으십시오. 여러분은 이미 죽었고, 여러분의 생명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느님 안에 숨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로의 말씀에 따르면, 우리는 신비적으로 그분과 함께 죽었습니다. 죽은 사람은 욕심도 없고 가지려는 집착도 없는데 아직까지 집착이나 욕심에 가려져 땅에 있는 것에 집중하여 속된 것들 안에 있기에 부활을 체험 못하고 있지 않나 싶기 때문입니다.
표징을 찾는 교회에는 여러 기질이 있고 서로 다른 사고방식이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처럼 막달레나 마리아의 깊은 애정이 있고, 요한의 직관이 있고, 베드로의 느린 동작이 있다고 합니다. 어떤 이들은 신속하고, 어떤 이들은 굼뜬 것처럼 교회에는 영적 은사가 다채롭고 제각기 형태가 다르기 때문에 ‘다양성 안의 협력’ 이라는 본보기가 이 일화에서 엿보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부활을 체험하려면 공동체가 필요합니다. 더불어 살아가는 가운데 그분의 부활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마리아의 애정이 있는 사람들은 베드로의 굼뜬 행동을 하는 이들에게 부활 하신 그분을 체험하도록 도와야 합니다. 요한의 직관이 있는 사람들은 애정만 가지고 있는 마리아에게 그분의 부활을 체득하도록 해야 하며, 베드로의 굼뜬 깨우침은 직관에만 의존하는 이들에게 그분의 부활을 체득하도록 해야 합니다.
우리가 공동체로 불림은 이래서 은총입니다. 우리가 공동체에 함께 한다는 것은 이래서 감격스럽습니다. 서로에게 등불이 되고 서로의 어둠을 밝혀주는 공동체가 있다는 것 그리고 내가 공동체의 일원이라는 것 그것이 바로 부활의 증표 아니겠습니까? 부활의 목격자로 하느님의 공동체에서 그분을 찬미함은 이미 주님의 부활이 우리의 부활임을 믿는 거룩한 믿음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예수님 진정으로 부활하셨습니다. 알렐루야, 알렐루야, 알렐루야!!!
–김 두진 바오로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