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해야 삽니다!

 

 

 

 

 

변해야 삽니다!

 

 

여성들은 예뻐지기 위해 거울 앞에 선다고 합니다. 예뻐지기 위한 것이겠지요. 예쁘기 위해서 여성들은 화장을 합니다. 저는 한 번도 해 보지 않은 것이지만 화장의 기본은 무엇일까요? 자기의 아름다움을 돋보이게 하고 자기의 약점을 가리는 것 아닐까요? 이를테면 코가 낮은 사람은 코가 높게 보이게 하고, 눈이 작은 사람은 눈을 크게 보이게 하며 눈썹이 적은 사람은 눈썹을 그려 진하게 보이게 하는 것이 여성들의 화장 아닐까요? 남성들은 어떨까요? TV나 그 밖의 매체를 통해서 유명한 이들을 보고 배우려합니다. 이를테면 유명한 사람이 입는 옷을 입으려하고 멋있는 행동들이나 말솜씨도 따라 하곤 합니다. 이렇게 따라하는 것은 멋있게 또 아름답게 변하고 싶은 욕구 때문이 아닐까요?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변모 이야기입니다. 거기에 맞추어 오늘 독서에서도 우리가 변해야 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화장이 약점을 감추고 강점을 잘 보이도록 하는 것처럼 우리가 변하려면, 제일 먼저 자기의 영혼의 상태를 봐야합니다. 먼저 자기의 약점을 보고 그 약점이 아름다울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사순 시기는 바로 변모의 시기입니다. 내적인 변화를 위해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 스스로 묻는 시기입니다. 오늘 영광스럽게 변한 예수님의 모습 때문에 제자들이 놓치고 만 것이 있습니다. 영광스러움에 넋이 빠져 예수님의 예루살렘에서의 십자가는 생각도 못했습니다.

 

첫 번째 독서는 아브람에게 하신 하느님의 약속과 그 둘 사이에 맺어진 계약에 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계약에서 짐승을 쪼개는" 예식은 계약을 위반하는 쪽이 쪼개진 짐승처럼 될것이라는 상호 합의하에 이루어 진 약속이였습니다. 즉 계약을 위반하면 쪼개진 짐승의 모습처럼 될 것이라는 섬뜩한 표현입니다. 그러나 독서가 너무 사실적으로 묘사되었기 때문에 잘 보지 못하고 넘어갈 수 있는 부분이 있는데, 그것은 하느님의 자기계시, "나는 주님이다"라는 말씀입니다. 하느님께서 하느님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셨습니다. 그리고 조건 없이 땅을 주시겠다는 약속을 하십니다. 그것은 하느님께서 아브람과 계약을 맺으실 때 그가 출중하거나 똑똑해서가 아니라 이 모든 것은 무시한 채 아무런 조건 없이 시작하셨다는 것입니다. , 하느님께서 먼저 아브람을 선택하시고 부르셨습니다. 우리도 아브람처럼 아무런 조건 없이 하느님의 불림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땅을 주시겠다는 약속처럼 조건 없이 구원의 잔치에 초대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하느님을 찾는 것보다 훨씬 더 강렬하게 우리를 찾아 조건 없이 구원을 약속하시는 분이십니다. 아브람처럼, 우리에게 주어지는 그분의 호의(자비)를 받아 드려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일상생활 안에서 계시며(임마누엘) 우리가 알아들을 수 있도록 우리를 두드리고 계십니다.

 

 

예수님의 변모에 관한 이야기는 예수님과 가장 가까운 제자들이 그분의 정체와 그분의 영광이 어떤 것인지를 볼 수 있도록 묘사하고 있습니다. 하늘에서 들려오는 목소리가 예수님을 "내 아들"이라고 확인합니다. 또한 율법의 모세와 예언의 엘리아가 예수님께서 곧 예루살렘에서 당하시게 될 사건들에 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영광에 싸여 나타난 그들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이루실 일, 곧 세상을 떠나실 일을 말하고 있었다." (루가 9, 31) 이 이야기가 예수님의 영광스러움을 말하고 있지만, 이 이야기에서의 초점은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입니다. 율법의 상징 모세와 예언의 상징 엘리아가 예수님의 죽음이 일어나기 훨씬 전에 그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는 것은 그분의 고난과 죽음이 우연한 사고가 아니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 변모사화는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이 가지는 영광스러움을 미리 보여 주고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하느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에서 드러난다는 것을 우리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은 비록 패배와 수치로 그려졌지만, 부활로 이어지는 상상을 초월하는 승리와 영광의 모습이기에 말입니다. 이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가 패배와 수치의 고통을 받는 사람들의 얼굴 뒤에 숨어 있는 예수님의 얼굴을 볼 수 있게 된다면 우리는 하느님의 영광으로 변모된 사람이지 않겠습니까?

 

제 2 독서에서 바울로는 그리스도를 받아들인 사람들에게 일어나는 변모에 대해서 말합니다. 바울로는 필립피 인들에게 변모하는 것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다 함께 나를 본받는 사람이 되십시오. 여러분이 모법으로 삼고 있는 우리처럼 살아가는 사람들을 눈여겨보시오" 하느님께서는 우리처럼 살아가는 사람들(사도 바울로와 그의 동료들 즉, 하느님의 뜻을 따라 사는 사람들) 안에 하느님께서 계시다는 말씀입니다. 우리 공동체에서 이런 이들을 볼 수 있을까요? 우리의 공동체 뿐 만 아니라 세상에는 의문의 여지없이 성실하게 남에게 헌신적으로 봉사하며 모범적으로 살아가는 이들이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그저 평범한 삶을 살아 갈 뿐이라고 말합니다. 아마 그럴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들의 평범한 삶 그 자체가 그들을 평범하지 않게 만들고 있다는 사실도 우리는 압니다.

 

성형수술을 하고, 화장을 하고, 멋있는 옷을 입고 멋진 행동을 한다면 겉모양은 변할 수 있지만 변모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영광스럽게 변모된다는 것은 먼저 우리의 십자가를 들어 올리는 일일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와 죽음을 기억하는 것은 그분의 십자가와 죽음이 우연이 아니었음을 아는 것처럼 우리의 삶의 무게가 우연이 아님을 인정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그저 영광스러운 모습에 갇혀 그분의 죽음의 의미는 생각치도 못한 제자처럼 되지 말라고 복음은 말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영광스럽게 변모된 모습 뒤에 숨겨진 십자가의 비밀을 알아내는 것이 사순시기라고 말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변모해야 삽니다.

 

 

                                                                                                                                                                                김두진 바오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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