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례식.
같은 교회, 시카고 한국순교자 천주교회에서 함께 교우 였던 다른 두 가정의 장례예절에 자리하여 봅니다.
한 장례식에는 아직 많은 이들이 일터에서 일을 마치지 못했을 이른 시간부터 문상객들로 붐비기 시작하더니 예식을 시작할 무렵에는 안팎으로 사람들이 넘쳐나 서 있을 자리마저 불편스려워 보입니다.
교회외부에서 오신 문상객도 섞였지만 많은 교우들이 이제 곁을 떠나는 교우의 영혼과 그 가족들을 위해 기도하고 위로하기 위하여 피곤한 몸을 끌고 일터에서 바로 달려 온 모습임니다.
희생과 봉사로 사랑을 실행하는 모습은 감사하고 감동 스럽기도 해 보입니다.
상을 당한 또 다른 교우 가정의 장례식장에도 들어가 봅니다.
앞 줄에는 몇 안되는 유가족들이 이별이 슬퍼서 망연자실하여 앉아 있습니다.
연도를 바칠 시간은 다 되었는데 문상객을 기다리는 뒷좌석들은 비어 있는채 썰렁하고 초조해진 연령회원들만 연신 문쪽을 바라 보아도 바람소리만 간간이 들릴뿐 인기척이 없습니다.
우연히 뒤를 돌아본 그 유가족은 고개를 떨굽니다.
민망스러워진 한 참례인이 물었습니다.
다음과 같은 (이유)들이 그 대답으로 돌아 왔습니다.
(저 돌아가신분은 교적만 있었을뿐 냉담자 였습니다. 그래서 누구신지 아는 이가 교우중에 없었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그 가족과 친지들은 너무 먼 곳에 살거나 해서 올수가 없었고 무신론자도 있고 원불교 신자도 있고 순복음교파도 있었고 무당마저 있었다고 하지요.(?)
그러니 우리 교우들이 일터에서 피곤한 몸으로 이런 모임에 오기를 바라는 일은 정말 무리 이지요. 잘 알지도 못하는 교우의 장례식까지 갈수야 있나요?)
잠시만 함께 생각해 봅시다.
모든 교우가 돌아가신 모든 교우의 연도와 장례미사에 참례하기는 어렵습니다.
일터에서 맡은 일에 충실한 것도 자신과 가족을 위한 당연한 의무이기 때문입니다.
또 그 시간에 너무 중요하고 피할수 없는 일도 있을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 무얼 같이 생각해 보자는것 이냐 하면 가령 이런것들 입니다.
앞서 예로 든 방이 넘치도록 찾아 준 문상객은 잘 못된일이 아니고 너무 좋은일 일것입니다. 다만 평소 잘 알지도 못했거나 냉담자였더라도 앞에 찾았던 열명중에 한명 비율로라도 찾아가 그 영혼과 쓸쓸해 하는 가족들을 위로해 줄수 있었으면 하는 바램일뿐 입니다. 가장 외롭고 쓸쓸히 슬퍼하는 이웃을 위로하라는 복음을 통한 예수님의 가르침을 함께 묵상해 보자는 셈이지요.
그걸 누군들 몰라서 가르치려는건가, 지금? 바뻐서 그렇다는데.
그런건 아닙니다.
제 자신을 살펴보니 바빠도 내가 가고자 하는 곳은 기여코 갈 시간을 만들어 내더군요.
또 한가지는 이럴 때 처럼 좋은 (선교의 기회)도 없지 싶습니다.
유가족이 냉담자 였거나, 무당이였도 예상치도 못했던 카돌릭 교우들이 물 밀듯이 밀려와 위로와 기도해 주는 광경을 보고 감격을 한방 먹고서 “이런 신앙이라면 나도 그들을 따라 가고 싶다.”는 마음이 끓어 예비신자교리반이 넘처나지 말라는 법도 있겠습니까?
교회의 많은 뜻 있는 이들이 냉담자를 다시 불러 모을 염려들을 합니다.
이런 때가 절로 주어진 좋은기회는 아닐까요?
(선교)띠를 두르고 거리에 나가는 일도 선교활동이지만 선교의 방법과 기회는 곳곳에 있을지 모릅니다.
끝으로
이런 일에 적극적으로 나설수 있는 가장 좋은 년령때가 (베드로)회원 일때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왜냐하면 대부분 생활일선에서 한발 물러나 있고 아직 무릎이 성해서 발로 걸어 찾아 나가 많은 주님의 일에 참여할 (힘)이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년말파티에서 가라오케로 목청을 돋으실수 있고 멋진 땐스 스텝 밟으실 무릎을 가지셨으면 (주님 보시기에 좋을) 많은 일들이 넘처나게 기다리고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이런 말씀은 저 자신이 베드로회원이면서 이렇게 ” 하자 “고 말로 하는일 말고는 실제로 (주님 보시기에 좋은일)은 하지도 않는 부끄러운 저를 돌아보고 채찍질 하는 심정으로 회개문 삼아 썼으니 고깝게 받지 마셨으면 합니다.
I am strongly agree with you.
Thank you for your thought and sha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