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에게 빵을 주다니 이게 웬 말인가?
우리말로 '개 같다'는 표현을 사람에게 쓴다면 불쾌한 욕이 됩니다. 어떤 이야기를 한다하더라도, 앞에 '개' 소리가 들어가면 모두 욕처럼 들리는 것은 사실입니다. '강아지'라 한들 그리 썩 듣기 좋은 말은 아닙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는 개 같은 여인의 울부짖음이 예수님의 사랑을 일구어 냅니다.
오늘 복음의 말씀 전에 예수님은 예루살렘에서 온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과 조상들의 전통에 관해서 격한 논쟁을 벌이셨습니 다.
예수님은 유다인의 전통 때문에 하느님의 계명을 어기지말 것이며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면 둘 다 구덩이에 빠질 것이라 그들에게 경고하셨습니다.
오늘 복음 말씀은 이스라엘의 지도자들과 격한 논쟁을 벌이신 후 이방인의 땅으로 가시면서 발생한 에피소드입니다. “예수님께서 그곳을 떠나 티로와 시돈 지방으로 물러가셨다.”(21) 티로와 시돈은 카르멜 산에서 북쪽으로 55킬로미터 떨어진 지중해변의 항구도시로 지금의 레바논 땅입니다. 마르코 복음에서는 이 여인이 시리아페니카아 사람으로 소개하지만, 마태오 복음에는 유다인과 상종을 하지 않는 가나안 여인으로 소개합니다. 우리가 아는 대로 유다인과 가나안 사람들은 조상대대로 적대적 관계에 있었기 때문에 원수와 같이 지내던 사람들입니다. (신명 7,1-6; 20,16-18 참조) 그 가나안 부인이 예수님을 향해 소리를 지릅니다. “다윗의 자손이신 주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제 딸이 호되게 마귀가 들렸습니다.” (22) 여인이 도움을 청하지만 아무도 주목하지 않습니다. 동네의 개 짖는 소리려니 생각하며 대꾸 조차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한마디도 대답하지 않으셨다.”(23) 제자들도 여인의 외침을 못마땅하게 생각해 “저 여자 를 돌려보내십시오. 우리 뒤에서 소리 지르고 있습니다.”(23)라고 합니다. “청하는 사람은 누구나 받을 것이다”라고 하신 예수님께서 이상하게 침묵을 지키실 뿐 여인을 도와주려하지 않습니다. 그분의 뒤를 소리 지르며 따라오던 두 명의 눈먼 사람을 곧바로 도와주신 것과는 대조적으로 (마태 9,27 이하), 이 여인에게는 말 한마디 건네지 않고 차갑게 대하십니다(23) 그러나 예수님의 침묵은 그녀가 시험 안에서도 견뎌내는 신앙을 지니기를,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항구한 갈망을 지니기를, 침묵의 응답 앞에서도 울면서 포기하지 않기를 바라시는 듯합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나는 오직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 들에게 파견되었을 뿐이다.”(24) 구약에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양이라고 지칭했습니다.(이사 53,6; 미가 2,12: 즈가 9,1 6참조) 즉, 예수님께서는 길 잃은 양처럼 헤매는 이스라엘 백성을 돌보시고자 파견되셨다는 뜻입니다. 마태오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들을 파견하실 때 “다른 민족들에게 가는 길로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들의 고을에도 들어가지마라.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가라."(10,5-6)고 명하셨습니다. 이는 초대교회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으로 사실 초대교회는 많은 논의와 갈등 끝에 이방인들을 받아들였습니다.(사도 10장 참조) 그러나 이 여인은 그런 말씀에 아랑곳하지 않고 외칩니다. “주님, 저를 도와 주십시오.”(25)
염치도 없이 체면이나 창피함은 뒤로한 채 주변의 무관심과 홀대를 견디어 내며 간절하고 절박하게 외칩니다. 이에 대한 예수님의 응답은 이상하리만치 무심하고 비정하기까지 합니다.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주는 것은 좋지 않다.” (26) 즉 이스라엘 사람은 자녀이고 이방인은 개라는 말씀입니다. 누가 들어도 경멸하는 듯한 말씀입니다. 이는 초대교회 당시 이방인들의 선교를 극렬하게 반대하던 유다계 그리스도인들의 표현이 아닐까 싶습니다. 사실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을 개, 혹은 돼지로 부르기도 했습니다. 여인과 그 지역 사람들이 들으면 화가 날 정도로 막된(?) 표현이지만, 여인의 대답은 슬기를 넘어 간곡한 기도로 들립니다.
“주님, 그렇습니다. 그러나 강아지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먹습니다.”(27)
마태오복음서의 독자는 유다계 그리스도교 공동체입니다.
예수님과 여인의 대화 안에서 우리는 마태오 공동체의 관심사를 볼 수 있습니다. 마태오 공동체는 ‘이스라엘 자손들의 빵’이 회심한 이방인들한테도 주어질 수 있는지 묻고 있습니다. 빵은 구원을 말합니다. 이 구원(빵)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어졌지만, 이방인들에게도 돌아갈 수 있는 것인지를 묻고 있습니다. 복음서 저자는 가나안 여인에게 보여주신 예수님의 행위를 통해 이 질문에 명백하게 답변합니다.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은 유다인과 이방인을 막론하고 진정한 믿음을 가진 사람이며, 아브라함처럼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믿으며, 어떤 어려움과 장벽 앞에서도 결코 뒤로 물러서지 않는 신앙을 지닌 사 람이 하늘나라의 상속자들(로마 4,925 참조)이라고 말입니다.
가나안 여인은 지혜롭게 대답합니다. 자신을 강아지에 빗대었는데도 전혀 동요할 줄 모릅니다. 오히려 이스라엘의 특권을 인정하고 자신의 처지를 수긍합니다. 해서 내겐 먹다 남은 ‘부스러기’라도 충분하다고 말씀드립니다. 예수님이 누구신지 알았기에 추호의 의심도 없이 자신의 바람을 거리낌 없이 간구했습니다. 여인은 자신의 신앙을 마음껏 훌륭히 입증해 보인 것입니다. 그녀의 슬기로 ‘자녀들의 빵’ 이 모든이의 양식이 되었습니다.
“아, 여인아!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 네가 바라는 대로 될 것이다.”(28) 예수님은 진정한 개종자의 믿음을 칭찬하십니다.
정결법 운운하며 옛 사람의 전통에 매여 있는 하느님의 백성보다 훨씬 더 하느님을 신뢰하고 의지하고 있는 여인의 믿음에 감 탄하지만 유다인들에게 이 일은 큰 도전이 될 것입니다. “바로 그 시간에 그 여자의 딸이 나았다.”(28) 이상하게도 이스라엘 백성들과는 갈등을 겪지만 이방인의 땅에서는 훌륭한 신앙인을 만납니다.
강아지 같은 믿음이 나에게 있는지 돌봐야 합니다. 오늘 복음은 묻습니다. 나에게 신앙의 걸림돌이 무엇인지, 이 개 같은(?) 여인의 믿음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는지……. 하느님의 백성이라 자처하는 우리가 이 가나안 여인의 인내와 지혜를 배우고 있는지 아니면 유다인의 지도자들 마냥 조목조목 따지며 신앙을 저울질 하고 있는지……..
– 김 두진(바오로)신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