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익광고의 사랑 법
"신문 대신 던져주는 시간 6초. 어르신과 함께 횡단보도 건너는 시간 23초. 후배에게 커피 타주는 시간 27초. 버스 벨 대신 눌러주는 시간 4초. 세상을 아름답게 하는 시간 하루 1분이면 충분합니다."
한국방송광고공사가 몇 년 전 지상파를 통해 내보내는 공익광고 '타인에 대한 배려' 편이 한동안 많은 시청자들에게 공감을 얻었습니다. 거창한 봉사가 아니라도 조금만 관심을 기울인다면 누구나 쉽게 실천할 수 있는 게 배려라는 뜻입니다. 이런 타인에 대한 배려는 작은 사랑의 실천으로 주위를 훈훈하게 하고 세상을 살맛나게 만듭니다.
오늘 복음은 마태오 복음의 산상수훈의 말씀입니다 지난주에 말씀드린 대로 6가지의 명제 중 나머지 3개의 명제를 오늘 해석하십니다. 예수님은 율법주의적 사고방식을 넘어 율법의 참뜻을 밝히셨습니다. 즉, 법의 형식논리를 넘어 법 정신을 추구하셨다는 말씀입니다.
어쩌면 이 말씀은 세상을 살아가면서 쉽게 잊어버리고 사는 것들을 챙겨 주시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동태복수법이라고 하는 이 법은 아직도 중동의 몇몇 나라에서 시행되는 법이라고 합니다. 얼핏 보면 정의로운 법 같으나 사실 무자비할 수 있는 법입니다. 가톨릭 대사전에 따르면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동태복수법의 원칙은 많은 모순과 갈등 속에서 점차 퇴색되어 갔다.
즉 랍비들은 모세의 법을 지키려는 결의와 동태복수법의 실행상 어려움 사이에서 많은 갈등을 겪었다. 강력한 폐기론의 근거는 어떠한 두 사람도 동일한 신체조직을 갖고 있지 않으므로 동태복수법의 적용은 결코 공정을 기할 수 없다는 데 있다. 결국 동태복수법은 금전적 보상제도로 대치되었고,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완전히 폐기되었다. 예수께서는 악행과 학대를 당할 때 보복하지 말라고 가르쳤다.
예수는 ‘눈에는 눈, 이에는 이’ 대신에 “원수를 사랑하라”는 원칙을 제시하고 있다." -가톨릭 대사전
그러나 과연 원수를 사랑하라는 이 말씀을 살아가는 것이 쉬운 일일까요? 결코 쉽지 않습니다. 원수를 사랑하려면 먼저 용서가 선행되어야 하는데, 용서조차도 쉽지 않은 일들이 세상엔 너무 많지 않습니까? 그러나 좀 더 생각해 보면 용서는 나에게 해코지 하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내 자신을 위한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내가 너무 자주 예를 든 이야기입니다만 때린 사람은 까맣게 잊어버리고 잠을 쿨쿨 자는데, 반대로 맞은 피해자는 몇 년이 지나도록 잠을 자지 못하고 분노해 한다면 불공평한 일이 되고 뭔가 잘못된 일 아니겠습니까? 이는 잊지 못하는 깊은 상처 때문이겠습니다. 그러나 용서는 잊는 것이 아닙니다. 상처는 잊을 수 없고 잊히지도 않습니다.
상처를 어찌 잊겠습니까? 또 내게 피해준 이의 죄를 용서한다는 뜻도 아닙니다. 죄의 용서는 하느님께서만 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용서는 "의미"입니다. 내게 벌어진 일들의 참 뜻을 찾는 것입니다. 벌어지면 안 되는 일이었지만, 이미 벌어진 일 가지고 누가 옳고 그름을 따져 물어 그 만큼 되갚아 주어야 해결된다면 세상은 피로 물든 복수와 보복의 세상으로 변하고 함께 하는 이웃은 실수 하지 말아야 하는 각박한 이웃이 되어 질 것입니다. 사실 내게 벌어진 일련의 사건을 그대로 되갚아 준들 피해자의 마음이 온전히 평화롭고 또 편하게 되겠습니까? 일어난 일들에서 받은 상처의 의미를 알게 될 때 아픔은 줄어들기 시작하고, 상처가 남아 괴롭긴 하겠지만, 찾아낸 의미로 상처를 바라볼 수 있게 됩니다.
오늘 복음의 말씀은 악을 선으로 갚으라는 어려운 주문 같습니다. 당신의 오른 뺨을 때리는 사람에게 왼쪽 뺨도 내어주라는 말씀은
이렇게 생각해 봅니다. 오른 손으로 오른 뺨을 때리려면 어떻게 때려야겠습니까? 손등으로 치는 수밖에 없습니다. 로마인들이 이스라엘 사람들을 경멸하며 때리는 방식입니다. 차라리 돌려 맞으면 즉 왼뺨을 내어주면 손바닥으로 맞게 되겠지요. 소심한 방법이긴 하지만,
인격적(?) 대응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맞았기에 도로 때려 준다해도 (동태복수법) 맞은 뺨이 덜 아프거나 기분이 풀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흥부의 아내가 놀부의 아내에게 밥주걱으로 뺨을 얻어맞자 다른 쪽 뺨마저 돌려댔다는 이야기처럼 참으로 지혜로운 선택은 무엇일까요?
누가 천 걸음을 가자고 강요하면 차라리 이천 걸음을 그 사람과 가라는 이야기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길을 연상합니다. 키레네 사람 시몬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지고 간 것처럼 로마 군인이나 관리들이 짐꾼이나 길잡이로 부리려고 유다인들을 강제로 징발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습니다. 이 때 천 걸음이 법으로 정해진 거리였습니다. 그러니 강제로 천걸음을 가지 말고 자발적으로 이천걸음을 걸으라는
말씀입니다. 요즈음 흔히 말하는 "피할 수 없으면 차라리 즐겨라!" 하는 말처럼 강요당해 종으로 살지 말고 자발적으로 해 자유로운 사람이 되라는 말씀입니다.
이 모든 말씀의 뿌리에는 사랑이 숨겨져 있습니다. 동태복수법에 의해 똑 같이 갚아준들 그것이 해결책이 아니며, 오히려 모두에게 더 깊은 상처를 남겨주는 일 뿐입니다. 사랑에는 분명 십자가가 감추어져 있습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흘려야 할 눈물도, 희생도, 배려가
함께 있는 이유는 바로 사랑의 십자가 때문입니다.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실 때 주님이 하셨던 말씀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그들은 무엇을 하는지 모르고 있습니다."라고 말씀하신 그분의 십자가의 정신을 배우는 것이 사랑입니다.
오늘 제 2독서에서 말하는 성전인 우리가 1독서에서 말하는 " 주 너희 하느님이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말씀과 "하늘의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라"하신 오늘의 복음 말씀이 하나의 주제를 말하고 있습니다.
사랑은 끊임이 없어야 합니다. 비록 넘어지고 실수를 하더라도 다시 일어서는 십자가의 사랑처럼 우리도 다시 일어서야 합니다.
작은 배려로 시작하는 사랑, 십자가의 사랑을 배우는 실천은 주님의 말씀을 상기시킵니다.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라!" 마태오 5,48
– 김 두진(바오로)신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