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이 있는 곳에 광명을…….

 

 

 

 

 

어둠이 있는 곳에 광명을…….

 

 

이제는 돋보기를 써야 책을 읽을 수 있는 나이가 되었습니다만, 눈이 잘 안 보인다고 말할 때 눈이 침침해진다고 합니다. 점점 어두움이 눈을 가리는 것이 아닐까요? 오늘 복음은 예수님과 태어나면서부터 소경인 사람과의 만남입니다. 제자들이 묻습니다. "스승님, 누가 죄를 지었기에 저 이가 눈먼 사람으로 태어났습니까? 저 사람의 죕니까, 그의 부모의 죕니까?" 기실 세상에 어느 누구도 태어나기 전에 죄를 지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부모의 죄로 인해 자식이 불구로 태어났다는 생각은 유다인들에게 낯설지 않았습니다. "주 너의 하느님인 나는 질투하는 하느님이다. 나를 미워하는 자들에게는 조상들의 죄악을 삼 대 사 대 자손들에게까지 갚는다." -탈출기 20,5; 신명 5,9 그러나 예레미아와 에제키엘 예언자 시대부터는 이미 자식이 부모의 죄 때문에 보속해야 한다는 생각은 거부 되었습니다. "그날에 그들은 더 이상 이렇게 말하지 않을 것이다. “아버지가 신 포도를 먹었는데 자식들의 이가 시리다.” 오히려 인간은 저마다 자기가 지은 죄로 말미암아 죽고, 신 포도를 먹은 사람은 모두 제 이만 시릴 것이다. -에레미아 31, 29-35) 이런 제자들의 질문에 예수님의 대답은 예상을 뛰어넘습니다. "하느님의 일이 저 사람에게 드러나려고 그리된 것이다." 죄 때문에 저리 태어난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일을 위해서라는 알아듣기 어려운 말씀의 뜻은 "세상의 빛"으로서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밝히는 자기계시인 동시에 고통을 죄의 벌로 생각하는 인간중심적 사고와는 다른 하느님 중심적 답변입니다. 즉, 하느님은 예수님 안에서 당신의 일을 하시며 그 일을 통해 당신 자신과 당신 아들을 영광스럽게 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행위는 계시적 특성을 지닌 "표징"이 되고, 태어날 때부터 소경이었던 사람을 치유하심으로 "세상의 빛"으로 세상을 밝히러 오신 그분은 모든 이들의 희망이며 세상의 구원은 그분을 통해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나를 보내신 분의 일을 우리는 낮 동안에 해야 한다. 이제 밤이 올 터인데 그때에는 아무도 일하지 못한다."(4)

'밤에는 일을 못할 것이니 빛이 있는 동안에 일을 해야 한다'는 예수님의 말씀에서 "밤"은 예수님의 수난의 "때"를 말합니다. 낮은 일 할 수 있는 때인데 비해 밤은 일할 수 없게 되는 때입니다. 이는 당신이 어떻게 돌아가실 것인지 암시하시는 것이기도 하지만, 이제 하느님의 일은 예수님 개인의 일이 아니라 우리 즉, 제자들의 사명으로 주어집니다. 제자들은 앞으로 예수님께서 하신 일들의 "증인"이 되기에 예수님과 함께 "하느님의 일"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어서 소경이 고쳐달라고 하지도 않았는데 예수님의 주도로 치유가 이루어집니다.(6-7) 예수님은 진흙과 침을 사용해 곧바로 소경을 치유합니다. 진흙을 침에 개서 그 진흙을 눈에 바르고 실로암 못으로 가서 씻으라고 합니다. 이런 행위는 고대에 잘 알려진 치유 방법이지만, 예수님으로 인해 치유가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이 사람을 창조하신 것처럼 진흙으로 빚은 흙을 눈에 바르십니다. 태어나 한 번도 빛을 본 적이 없는 소경에게 빛을 보게 하는 것은 창조입니다. '실로암'은 히브리어로 '실로하흐'의 그리스식 발음입니다. 그 뜻은 "물을 내어 보냄" 혹은 "수로"를 뜻하는데 요한복음사가는 "파견된 자"라고 의역 합니다. 이로써 실로암(파견된 자)으로 가서 씻은 소경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세상을 보게 되고, 예수님의 정체에 대해 증언하는 임무가 맡겨집니다. 사실 체험해 본 사람만이 그 사람이 자신한테 무엇을 해주었는지, 그 사람이 누구인지 정확하게 증언할 수 있습니다. 체험 없는 지식에서 나온 바리사이들의 답답한 판단 앞에서 무식한 소경이 끈질기게 증언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자신의 인생을 바꾼 체험 덕분입니다.

“내 눈을 뜨게 해주신 분은 ‘예수님이라는 분’ (11), ‘예언자’ (17), ‘하느님에게서 오신 분’ (33)” 등등……. 예수님을 체험하지 못한 소경의 부모는 내 아들이 소경이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어떻게 그가 눈을 뜨게 되었는지는 모르니 체험한 자기 아들에게 물어보라 합니다.

 

우리가 그분의 증인이 되려면 당연히 그분을 체험해야 합니다. 우리 신앙생활 안에서 그분을 체험하신 적 있습니까? 기도 중에, 아픈 이들을 만나면서 또 우리의 고통 안에서 그분을 체험해 보셨습니까? 저의 개인적 체험을 감히 말씀드리자면, 다시 걸을 수 있을까 싶었던 걱정과는 달리 믿기 어렵게 빠른 회복과 치유가 그분을 체험하게 합니다. 물론 많은 이들의 기도와 도움 그리고 사랑이 저를 다시 설수 있게 만들었음을 믿으며 예수님의 치유는 그분께서 말씀하신

"우리" 를 통해서도 이루어짐을 요즈음 순간, 순간 체험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다른 이들과 함께 보고 들었지만 닫힌 마음으로 체험을 할 수 없었던 바리사이들은 결국 마지막까지 믿기를 거부하고 소경을 밖으로 쫓아버립니다.(34) 예수님이 세상을 비추는 빛임을 알지 못하게 하는 증오에 찬 배타적인 종교는 ‘눈 먼’종교이고, 상처를 폭력으로 되갚는 종교 또한 '눈 멂'에 불과 합니다. 받은 대로 돌려주는 것은 정의를 가장한 폭력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바리사이들은 예수님으로부터 “눈먼 자요 죄인” (41절)이라는 질책을 받게 됩니다.

 

끝까지 ‘하느님의 일’을 하시는 예수님의 태도는 바리사이들이 쫓아낸 소경을 만나 대화하는 장면에서 계속 이어집니다. 그분은 먼저 “너는 사람의 아들을 믿느냐?” 라고 질문합니다.(35) ‘사람의 아들’이라는 칭호는 예수님이 수난당하기 전날 밤에 제자들 앞에서 하신 말씀을 연상시킵니다. “이제 사람의 아들이 영광스럽게 되었고, 또 사람의 아들을 통하여 하느님께서도 영광스럽게 되셨다.”(13, 31) 소경은 곧바로 예수님 앞에서 스승을 따르는 제자로 변합니다. “선생님, 그분이 누구이십니까? 제가 그분을 믿을 수 있도록 말씀해 주십시오.”(36) 예수님은 당신이 그의 시력을 되찾게 해주신 것 자체가 바로 당신의 정체를 알린다고 말씀하십니다. “너는 이미 그를 보았다. 너와 말하는 사람이 바로 그다.”(37) 예수님이 당신을 삼인칭 (그)을 사용해 거리감을 두고 하시는 말씀은 지난주일 복음에서 사마리아 여인한테 하신 것처럼 당신을 계시하는 것입니다. 이 계시로 예수님과 소경의 대화는 신앙고백에 머물지 않고, 예수님에 대한 경배로 이어집니다.(38) ‘어둠’ 에서 ‘빛’ 으로 건너간 이 사람은 깊은 체험을 통해서 사회적 소외나 개인적 모욕과 박해에 영향을 받지 않고 자신의 길을 충실하게 가게 된 새 사람으로 창조되었습니다.

 

세례는 “성령에 의한 재생과 경신의 목욕”(티토 3,5)이라고도 불립니다. “이 목욕은 조명이라고 불리는데, 교리교육을 받은 사람들이 마음에 빛을 받기 때문에.” 세례로써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 빛”(요한 1,9)이신 말씀을 받은 영세자는 “빛을 받고 나서” “빛의 자녀”가 되고, 그 자신이 “빛”(에페 5,8)이 됩니다. -가톨릭 교리서

 

오늘 제2독서에서 바오로는 세례를 통해 빛이신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가르칩니다. 그렇습니다! 세례 받은 사람은 “빛의 자녀”(8절) 입니다. 어둠이 있는 곳에 광명을 가져다주는 사람이 바로 우리들이고, 그 우리들은 이제 하느님의 일을 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주님을 체험한 사람들답게 세상의 빛이신 주님의 증인들입니다.

 

                                                                                                                                                                                              – 김 두진(바오로)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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