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만큼 사랑합니다.”

이만큼 사랑합니다.”

 

이십년이 훨씬 넘은 오래 된 이야기 하나 하겠습니다. 한국에서 피정지도 때의 일입니다. 젊은 여성들의 피정은 주로 평일에 하는데 그 때 꼬마 아이들을 데려오는 엄마들이 많습니다. 그 시절만 해도 탁아소나 유치원이 그리 많지 않아서인지 젊은 엄마들이 아이들을 집에서 키우는 가정이 많았습니다. 짐작이 가시겠지만 꼬마 아이들은 늘 피정에 방해가 됩니다. 서로 싸우며 울고, 웃고, 떠들고 시끄럽고……. 해서 이렇게 아이들이 많을 때는 여직원에게 부탁을 해서 아이들만 따로 모아 수도원 경당에서 놀게 합니다. 한번은 사순 피정 중 예수님의 사랑에 대해 강론을 하고 있었을 때였습니다. 한참 강론에 열을 올리고 있는 도중에 수도원 경당에서 놀아야 할 여자 꼬마 녀석이 강의실 문을 박차고 뛰어 들어오면서 큰소리로 자기 엄마에게 물었습니다. “엄마, 엄마 예수님이 얼마나 우리를 사랑하는지 알아?” 당황한 엄마는 아이를 데리고 강의실을 나갔습니다. 돌아오려니 하고 생각하고 강의를 하는데 강의가 다 끝나도록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점심시간이 되서야 만났는데 왜 강의에 안 들어왔느냐 물었더니 자기 딸이 강론을 해 주어서 들어오지 않았더랍니다. 7살 먹은 꼬마가 무슨 강의를 했는지를 물었더니 예수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는지를 설명을 하는데 꼬마의 귀여운 양팔을 한껏 벌리며 이만큼~” 사랑하신다는 말을 하더랍니다. 예수님이 이만큼 사랑하는지를 어떻게 알았는지를 물어보니까 그 꼬마 녀석의 대답은 어느 신학자도 할 수 없을 만큼 충격적인 설명이었습니다. “내가 예수님한테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세요? 하고 물어보니까 예수님이 양팔을 벌리고 이만큼하고 있었어.” 하더랍니다. 개인적으로 내가 수도원 경당을 몇 번이나 들락거렸을까요? 셀 수 없을 만큼일텐데 양팔을 벌리고 나는 너를 이 만큼 사랑하고 있다는 그분의 모습을 한 번도 보지 못했습니다. 내가 보지 못한 것을 그 꼬마 아이는 어찌 단 한 번에 볼 수 있었을까요? 20여년이 훨씬 지난 지금도 선명하게 기억되는 가히 충격적인 십자가의 설명이었습니다.

 

오늘 제 2 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예수님의 십자가가 무엇인지를 선포합니다. 바로 유다인들이 기적을 요구하는 것처럼 우리들도 신앙에서 뭔가 화끈하고 기적적인 것을 요구하면서는 십자가의 의미를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또한 그리스인들이 지혜를 찾는 것처럼 우리도 하느님을 지혜로 따지고 또 이해하고 규정화 시키려는 의도는 신앙에 도움이 아니라 해가 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유다인들은 메시지의 신빙성을 보증하는 기적이나 표징을 추구하고 그리스인들은 지성을 만족시키는 지혜를 추구한다고 말하면서 이치를 추구하는 것과 표징을 요구하는 것이 꼭 나쁜 것은 아니지만 신앙을 받아들이는 조건으로 삼는데 문제가 있다고 지적합니다. 즉 신앙을 받아들이는 것이 어떤 환상이나 기적 혹은 내 이론에 정확하게 맞아 떨어지고 이해가 되어야만 받아들이려는 것은 올바른 신앙의 모습이 아니며 신앙의 발전도 있을 수 없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얼핏 보면 십자가의 선포는 사람들의 기대와는 정반대입니다. 사람들이 기대하는 것은 하느님 능력의 표징인데, 그 대신 무능력의 표징이라 할 수 있는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가 선포되며, 사람들이 추구하는 것은 지혜인데 그 대신 어리석음의 표징이라 할 수 있는 십자가의 그리스도가 선포되기 때문입니다. 해서 오늘 복음에서 성전을 정화하시는 예수님에게 유다인들이 계속 표징을 요구하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성전을 허물어라! 내가 사흘 만에 다시 세우겠다.” 성전이 예수님의 몸을 지칭한다면 바로 그 성전은 우리의 몸도 됩니다. 성전을 정화하시는 예수님께서 우리도 십자가의 무능력과 어리석음으로 정화되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사순시기에 양팔을 벌리고 이만큼~” 사랑하시는 그분을 그 꼬마의 마음처럼 단순하게 그리스도를 바라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것이 십자가의 신비를 이해하는 길이며, 십자가를 아는 것입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머물러 십자가를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게 될 때 우리 성전, 즉 우리 자신을 정화하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이만큼~” 저희를 사랑하시는 예수님, 저희들도 당신을 그만큼사랑하게 하소서.



                                                               – Fr. 김 두진(바오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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