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순교자 대 축일에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를 버리고 매일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자기 자신을 잃거나 해치게 되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럽게 여기면, 사람의 아들도 자기의 영광과 아버지와 거룩한 천사들의 영광에 싸여 올 때에 그를 부끄럽게 여길 것이다.” (루카 복음 9장 23-26)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기 힘듭니다. 오늘 말씀에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 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하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내가 가지고 있는 십자가는 달랑 목에 걸려있는 작은 목걸이와 주머니 속 묵주에 달려있는 조그만 십자가 뿐 입니다. 그런데 자기를 버리라 하십니다. 자기를 버리는 것이 내 십자가를 지는 것이라고 하십니다. 내가 하는 생각에서 내가 하는 말이 나오고, 내가 하는 말에서 행동이 나오며, 내가 하는 행동에서 습관이 나오고, 내 습관은 성격을 형성하게 되고, 내 성격은 내 운명을 만드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결국 내 운명을 바꾸려한다면 거슬러 올라 내 생각을 바꿔야 합니다. 결국 송두리 채로 바꿔야 하는 것이지요. 어찌 보면 내 생각으로 이루어진 나는 나의 제일 큰 적이며, 우상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내 것이 중요하기에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 좋아하는 것, 나를 즐겁게 하는 것, 위로받고 싶고, 인정받고 싶고, 존경받고 싶은 이 모든 것이 나의 십자가가 아닐까 싶습니다.
해서 여기서 해방되려면 매일 주어지는 새로운 내 십자가를 지고 살아야 한다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오늘은 한국 순교자 대 축일로 그들의 삶을 조명하며 순교자의 삶을 살고자 하는 주일입니다. 우리가 순교자의 삶을 배운다는 것은 어쩌면 나만을 위한 삶에서 더불어 기쁘게 살기 위한 자신의 버림이지 싶습니다.
한국의 순교자들을 기억하는 축일에 순교의 역사를 들여다보는 것은 의미 있는 일입니다. 북경에서 이승훈이 세례를 받고 귀국한 것이 1784년입니다. 그 이듬해인 1785년부터 시작된 박해는 1882년 조선조정이 미국과 수호조약을 맺기까지 약 백 년 동안 지속되었습니다. 특이한 점은 한국인들 스스로 중국으로부터 신앙을 가져온 사실입니다. 이는 가톨릭교회 선교 역사에 처음 있는 일입니다. 그러나 신앙이 한국 땅에 들어와서 뿌리도 채 내리기 전에 박해는 시작되었습니다.
천주교 관계 한문서적들, 마태오 리치의 천주실의를 비롯한 한문으로 된 몇 권의 서적이 우리나라에 들어온 것은 17세기 초였습니다. 이승훈이 세례를 받기 약 150년 전의 일입니다. 즉 신자가 되기 전부터 우리 조상들은 천주학을 공부하며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사람들은 그것을 서학이라 했습니다. 시대 그 문서들을 영입하여 연구한 사람들은 실학파라 불리던 유교 학자들이었습니다. 실학파학자들은 합리적이며 현실성 있는 학문과 사회 제도를 찾고 있었습니다.
임진왜란이라는 엄청난 민족적 시련을 겪은 직후에 실학파가 연구한 천주교는 하느님에 대한 믿음이기도 하였지만, 또한 새로운 세계관이며 사회관이기도 하였습니다.
그 시대의 법은 당시에 자행되던 부정부패와 약자에 대한 횡포를 방관할 뿐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조장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신앙은 하느님이 자비로우시고 사랑하신다고 가르칩니다. 그것은 그들에게는 새로운 시야를 열어주었습니다. 무자비한 법과 제도에 한 마디 항의도 못하며, 짓눌려 살다, 죽어 가는 사람들에게 하느님으로 말미암은 질서, 곧 정의와 자비와 사랑에 대한 가르침은 그 시대 사회가 안고 있던 모든 부조리를 한 순간에 걷어내는 기적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야말로 ‘새 하늘과 새 땅’을 열어주는 일이었습니다.
순교자들 중 백정 출신인 황일광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가 남긴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나에게는 천당이 둘 있다.
하나는 죽어서 가는 천당이고 또 하나는 양반과 쌍것들을 가리지 않고, 모두를 똑같이 존중하는 이 세상의 천당이다.”
백정출신으로 멸시당하며 살던 사람이 신앙인이 되어 그리스도 신앙공동체 안에서 느낀 것이었습니다. 계급의 장벽 없이, 모두가 형제자매로 통하는 신앙공동체는 그에겐 천당이었습니다.
순교자들은 이 ‘새 하늘과 새 땅’을 위해 그들의 목숨을 버렸습니다. 그들은 하느님으로 말미암아 열리는 새로운 세상과 새로운 질서를 열망하였습니다. 오늘 제2독서에서 바울로 사도는 말씀하십니다. 이 세상의 그 무엇도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갈라놓을 수 없습니다.”(로마 8,39) 우리의 순교자들은 그 하느님의 사랑을 믿었습니다. 그들은 그 믿음을 버리지 못하여 모진 형벌을 감수하고 생명을 잃으면서도 그 사랑을 열망하였습니다. 그분들은 죽음을 넘어 하느님을 향해 떠났습니다.
십자가를 지기 위해 자기를 버리는 것은 예수님의 제자라면 당연한 것입니다. 특히 순교자의 피로 얻은 신앙이라면 자기를 버림은 사랑의 삶이 됨을 기억해야 합니다.
김 두진(바오로)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