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 앉으셨습니까?
저는 늘 앞자리에 앉습니다. 성당에서 미사를 봉헌할 때야 어쩔 수 없는 일이라 해도 어디에 초대를 받아가도 내 자리는 앞에 있습니다. 사진을 찍을 때도 늘 중앙에 자리해야 합니다. 뒷자리나 옆자리나 뒷자리로 슬며시 사진을 찍을라치면 욕먹기 십상입니다. 자리에 대해 말이 나왔으니, 우리 성당에서 미사를 봉헌하면 재미있는 사실 하나를 발견합니다. 신자들은 고정석을 좋아하나 봅니다. 한 번 앉으면 그 자리만 고집합니다. 물론 나쁜 것은 아니지만 한번쯤 맨 뒷자리에 앉아 계신 분들이 앞자리로 앉아 보심은 어떨까요?
"예수님께서는 초대받은 이들이 서로 윗자리에 앉으려는 모습을 바라보시며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누가 너를 혼인 잔치에 초대하거든 끝자리에 앉아라." 끝자리에 앉는 이유가 앞자리로 올라가기 위해서라면 그것도 사실 웃기는 이야기입니다. 만약에 윗자리로 올라가려고 끝자리에 앉았는데 주인이 아무소리 안하고 계속 거기에 앉아 있으라 한다면 그 얼마나 초라할까요? 그래서 올라가기 위해 일부러 내려가는 것도 자기를 내려놓지 않으면 쉽지 않은 일입니다.
몇 해 전에 한국의 한 백화점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쇼핑을 마치고 먼저 나온 50대의 엄마가 늦게 나오는 딸을 기다리기 위해 출입구 앞에서 자동차를 비스듬히 세워놓고 있는데, 주차요원이 와서 다른 차도 세워야 하니까 자동차를 바로 세울 것을 요구했답니다. 물론 오해의 소지가 조금 있긴 했다 치더라도 그 50대의 여성이 알바생 이었던 주차요원 네 명의 무릎을 꿇리고 폭언을 내 뱉은 사건, 이름하여
'백화점 모녀 갑질 사건'입니다. 또 우리가 잘 아는 '땅콩 회항사건' 이 또한 '갑질'로 인한 많은 사람들의 울분을 사게 한 사건입니다.
요즈음 '갑질'이라는 말이 심심치 않게 들립니다. 갑과 을의 관계에서 부와 권력을 거머쥔 갑의 횡포에 힘없고 가난한 을은 늘 불이익을 당하고 상처를 받습니다. 인터넷 검색 창에 ‘갑질’을 찾아보니 이렇게 설명합니다. "비교적 최근에 생겨난 말로 ‘유리한 위치에 있는 사람이 약자인 상대에게 하는 부당한 행위’를 가리킨다. 이 말은 차례나 등급을 매길 때 첫째를 이르는 ‘갑’에 접미사 ‘질’이 결합해서 만들어졌다. 보통 계약서를 쓸 때 계약의 두 당사자를 편의상 ‘갑, 을’로 칭하게 되는데, 이때 상대적으로 우위에 있는 쪽이 ‘갑’이 된다. 이런 관습으로부터 ‘갑’에는 권력이나 지위가 높은 쪽, ‘을’에는 낮은 쪽의 의미가 덧씌워지게 되었다." 즉 힘 있는 자들이 힘없는 자들에게 저지르는 횡포를 말합니다. 사람들의 높고 낮음이 지식의 수준이나 갖고 있음과 갖지 못함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삶의 태도와 행동에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세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일단 가지고 있는 직함에 따라 자리가 매겨져 갑과 을의 자리는 명백합니다.
효경(孝經)에서 공자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윗자리에 있으면서도 교만하지 않으면, 지위가 높아도 위태롭지 않다. 절제하고 아껴 삼가 법도에 맞게 하면, 가득 차더라도 넘치지 않는다.” 그렇습니다. 동서고금을 불문하고 최고의 미덕은 ‘겸손’일 것입니다. 겸손이란 스스로 낮춘다는 뜻입니다. 어떤 사람이 아무리 똑똑하고 훌륭한 일을 한다 하더라도 겸손하지 않으면 욕먹기 십상입니다.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는 속담처럼 지위가 높고 재산이 많을수록 더 요구되는 덕이 바로 겸손과 절제입니다.
도가(道家)의 노자는 자신을 낮추는 겸손의 덕을 물에서 찾았습니다. 최상의 선은 물과 같다는 뜻으로 '상선약수(上善若水)'라고 하는 이 말은 “가장 선한 사람은 물과 같다. 물은 만물을 이롭게 하지만 다투지 않으며, 주로 사람들이 싫어하는 곳에 머무른다. 그러므로 도에 가깝다.” 그렇습니다. 겸손한 사람들은 모두를 이롭게 하고, 다투지 않으며 늘 낮은 곳에서 머무는 사람들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렇다고 겸손은 잘하는 것을 못한다고 하는 오만이어서도 안 되고, 못하는 것을 잘한다고 하는 교만이어서도 안 됩니다. 겸손 (Humility)이라는 말은 Humus라는 라틴어에서 왔고, Humus는 흙이라는 뜻이니, 겸손은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용기여야 합니다. 돌아가신 김수환 추기경께서 하신 말씀 가운데 예수님을 땅에 비유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대지는 겸허합니다. / 더 이상 내려갈 수 없을 만큼 내려 서 있습니다. / 사람들의 발아래 있고 짓밟힙니다. / 세상의 모든 더러움과 썩고 죽은 것까지 받아들입니다. / 그리하여 대지는 부패와 죽음을 극복하고 이를 오히려 밑거름으로 삼아 새로운 생명을 낳습니다. / 그리스도가 바로 이런 분이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예수님을 초대한 이유는 그분이 안식일에 일을 하시는지 안 하시는지 알아보기 위한 자리였습니다.(루카 14,1-6 참조) 예수님은 '어떻게 저 사람을 없앨까'하는 더럽고 썩었으며 죽어버린 바리사이들의 마음에 생명의 말씀을 전하십니다. 그리스도가 바로 이런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이어서 말씀하십니다. 식사를 베풀 때 보답할 수 있는 사람보다는 오히려 보답할 수 없는 사람들을 초대하라고 하십니다. 즉 사랑을 이해득실을 계산하지 말고 베풀어 한다는 말씀입니다. 이쯤 되면 왜 예수님께서 높은 자리에 연연하지 말라고 하셨는지 이해가 됩니다. 그 잔치에 초대 받은 사람들은 이해득실의 관계로 와 자기가 어디에 앉아야 하는지 이미 생각하고 있습니다. 내가 해 준 것이 얼만데, 내가 도운 것이 얼마나 많은데,………. 사랑은 그저 베풂이어야 합니다. "내가 너에게 해 준 것이 얼만데, 내가 해 준 것의 반의반만이라도 해 주어야지,……." 내가 베푸는 사랑은 보답을 위한 것이 아니어야 합니다. 사랑은 자발적인 내어줌으로 기쁨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자기 자신만을 소중히 생각하는 좁은 마음에서 벗어나 살도록 가르치셨습니다. 그러나 나 자신을 높이고 과시하고 싶은 마음, 준만큼 받아내고 싶은 마음은 사람 모두의 몸과 마음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너희는 내 몸을 받아먹고, 내 피를 마시라'시던 예수님의 말씀으로 새로운 살과 새로운 피를 우리 안에 모셔 들여야 합니다. 그분의 말씀이 우리를 비추게 하고, 예수님의 몸과 피를 먹고 마시는 성체성사가 우리를 움직이게 해야 합니다.
맨 끝자리를 선호하는 분들이 앞자리에 먼저 와 앉는 것도 늦게 성당에 오는 분들을 위한 자발적 배려도 됩니다. 겸손함(Humility)을 통해서 스스로 자신을 낮추신 예수님처럼, 발아래 짓밟히는 대지처럼, 그리고 끝없이 아래로 흘러 내려가는 물처럼(Humiliation) 모두를 이롭게 하고, 다투지 않으며 낮은 곳에서 머무를 때, 꼴찌가 첫째 되듯 우리도 하늘나라에서 높이 들어 올려 질 (Exultation)것입니다.
김 두진(바오로)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