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13일 주님 수난 성지 주일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다.’ 똑같은 것을 자기에게 이로울 때는 받아들이고 그렇지 않을 때는 가차 없이 버리는, 한심한 짓이다. 한 때는 그렇게 떠받들어 대더니 지금은 언제 그랬냐는 듯 잘못을 들춰내는 정치인들의 모습이 이제는 낯설지도, 새롭지도 않지만, 한심하다는 생각은 여전하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전에 입성할 때에 제자들은 어린 나귀 위에 자기들의 겉옷을 걸치고 예수님을 모셨다. 거기에 길가의 나뭇가지를 꺾어 흔들며 예수님을 열렬히 환영하고 자기들의 겉옷을 그 분 가시는 길에 깔았다. 그들은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 임금님은 복되시어라. 하늘에 평화, 지극히 높은 곳에 영광!”(루카19,38) 하고 목청 돋우어 외쳤다.
열렬히 주님을 환영하던 군중들은 빌라도 앞에 선 예수님을 보고 “그 자를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루카23,21)하고 외친다. 정말 ‘세상에 이런 일이!’ 다. 사실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행위’는 남의 일이 아니라 바로 나의 모습일 지도 모른다. 세례성사를 받으면서 ‘하느님의 자녀로 자유를 누리기 위하여 모든 죄를 끊어 버리고, 죄의 지배를 받지 않기 위해 악의 유혹을 끊어버린다.’고 자신만만하게 선언했지만, 여전히 죄에 눌려 살아간다. ‘하느님을 믿으며, 그리스도를 통해 주어지는 영원한 생명을 믿고, 육신의 부활을 믿는다.’고 고백했지만, 입으로의 고백일 뿐 마음은 멀리 있다. 무슨 나쁜 일이 생기면 용한 사람 먼저 찾고 오늘의 운세가 좋지 않더니 결국 이런 일이 벌어 졌다고 투덜댄다. 자녀의 결혼 날짜를 길일로 정하려고 점쟁이를 찾아갔는데 사람이 너무 많아서 묵주기도 하면서 자기 차례를 기다렸다는 사람도 있다.
성주간으로 들어서는 사순의 마지막 주일에 들리는 말씀에는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우리와는 전혀 다른 예수님의 모습이 소개된다. 극도의 고통과 비참 속에서 돌아가셨지만 그것은 결코 불의에 대한 저항도, 종교적 심성의 발로인 비폭력 순응도 아닌 매우 독특한 속성이 있다. 체념으로 말미암은 수동성이나, 좌절과 절망에 항복하는 무기력과는 구별되는 당당함이 넘쳐나고, 동시에 자기 지지자들의 분노를 가열시켜 체제 전복을 부추기고 사회를 광폭에 휘둘리게 하는 선동성도 없다. 저항도 순응도 아니었던 예수님의 태도는, 하느님과 인간을 향한 ‘완전한 사랑과 그 안에서 벌어지는 자발성’이었다.
사랑은 기본적으로 자발성이라는 속성을 가지고 있는데, 예수님은 하느님을 향한 충직함과 인간에 대한 사랑으로 그 어떤 힘에도 훼손되거나 파괴되지 않으시고, 오로지 자발적인 헌신과 내어 줌, 신뢰와 신념으로 당신의 사명을 완수하신다. 모든 것을 내어주고 가장 낮아지는 길을 선택하신 예수님의 수난은 그 길이 곧 구원이며 영광이라는 역설을 끄집어내고 있다.
고학력자들이 넘쳐나고 생존을 걱정하지 않아도 될 만큼의 부를 소유하게 되었다고 해서 그것이 곧 사회의 질적 향상과 직결되지 않음을 뻔히 알면서도 은근히 그것을 바라는 우리는 과연 올바른 믿음의 소유자일까? 사람을 변화시키는 힘은 나를 위한 누군가의 헌신과 내어 줌, 변함없는 사랑과 희생을 직접 목격하고 배우며 그 경이로움에 온전히 동화될 때 비로소 시작된다. 예수님은 바로 이러한 진리를 몸소 증명하셨다. 우리를 정치적 능력이나 군사적 힘으로 구원하지 않으시고 자신을 낮추시어 세상에 오시고 온전히 내어 주심으로 구원하셨기 때문이다.
제1독서의 이사야서 본문 역시 모든 수난과 고통을 감내하게 하는 힘은 하느님께 대한 신뢰라고 한다. “나에게 제자의 혀를 주시어… 격려할 줄 알게… 아침마다 일깨워 주신다. 내 귀를 일깨워 주시어… 듣게 하신다.”(50,4) 특별히 주님의 종은 모욕하는 자들의 폭력에도 물러서지 않는데(5-6) “주 하느님께서 나를 도와 주시니 나는 수치를 당하지 않을” 것임을 알기 때문이다. (7)
그래서 예수님의 죽음은 영웅들이 남겼던 역사적 사실과는 분명히 다르다. 당신을 고통스럽게 한 이들의 죄를 밝혀 누가 진정한 의인이고 죄인인지를 따지지도 않으셨고, 자신의 무죄함을 항변조차 하지 않았으며, 그 수난과 죽음이 얼마나 가치 있고 고귀한 것인지 과시하지도 않으셨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그 수난과 죽음을 진정한 구원의 길로 인정하시어 “그분을 드높이 올리시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그분께” 주신다. (필리 2,9)
예수님의 수난은, 그분의 고통이 우리의 불행보다 더 처참했기에 우리게 위안을 주기 위한 것도, 그분처럼 잘 참으면 천당에 가게 된다는 편의적 발상도 아니다. 구원을 이루는 힘은 누군가의 내어 줌과 사랑에 근거한다. 메시아의 수난은 이러한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 계획되고 실현된 위대한 하느님의 일이었다. 거룩히 시작된 성주간, 성삼일의 전례를 통해서 부활에 이르는 우리였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