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소공동체 자료

2014. 4월 소 공동체 모임
 
 
 
주제 복음 : 구역, 반 모임 주간에 따라 복음 선택 가능합니다. 
4월 6일 사순 제5주일 요한 11,1-45
4월 13일 주님 수난 성지 주일 마태 26,14-27,66 또는 마태 27,11-54
4월 20일 예수 부활 대축일 요한 20,1-9
4월 27일 부활 제2주일 요한 20,19-31

시작, 마침성가 :  사순시기, 부활 주간에 따라 성가 선택 가능합니다.       

그리스도인이란 무엇인가?
하느님은 사랑이시며,
우리 희망의 전부임을
굳게 믿는 사람이다.
그리고 그분이 희망을 이뤄 주기 위해
우리를 지극히 사랑하고 계심을
믿는 사람이다.
(추기경 김수환 이야기, 평화방송~평화신문, 2006, 348쪽)

    

“주님, 저의 반석, 저의 구원자시여 당신 앞에 드리는 제 입의 말   씀과 제 마음의 생각이 당신 마음에 들게 하소서.”     (시편 19,15)

주님은 저의 반석, 저의 구원자

찬양 시편(2-7절)과 교훈 시편(8-15절)으로 이루어진 시편 19편은 ‘주님은 저의 반석, 저의 구원자’라고 노래합니다. 그런데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께 대해 어떻게 이런 깊은 믿음을 보일 수 있을까요? 하느님의 모습을, 하느님께 대한 체험을 어디에서 알아차릴 수 있을까요? “하늘은 하느님의 영광을 이야기하고 창공은 그분 손의 솜씨를 알리네.”(19,2)라는 시편의 노래처럼 자연을 통해 하느님의 놀라운 손길을 느낄 수 있습니다. 자연의 아름다운 풍광 앞에서 “오 아름다워라 찬란한 세상 주님이 지었네.”라고 성가를 자연스럽게 부르게 됩니다. 자연뿐만 아니라 역사적 사건들 안에서, 그리고 우리의 일상의 만남 안에서도 주님에 대한 체험을 하곤 합니다.

시편 19편은 하느님의 놀라운 창조의 손길을 노래한 다음, 주님의 가르침을 따라 충실하게 살아야 함을 일깨워줍니다. 창조주이신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것이 인간의 사명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가르침을 충실히 지키는 삶 안에서 하느님의 손길을 깊이 느낄 수 있고, 또한 이것이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길임을 알려줍니다. 주님의 가르침은 인간의 삶이 어떤 지향을 지녀야 하는지, 어떤 적합한 방법을 선택해야 하는지를 일깨워주는 길입니다. 어두운 밤 깊은 산속에서 북극성이 방향을 알려주고, 망망대해에서 등대의 불빛이 안전한 항구를 일러주는 것처럼 세상살이의 풍파 속에서도 세상의 가치에 휩싸여 가라앉지 않고 나아갈 수 있는 신앙의 길, 신앙의 방향을 일깨워주는 것이 주님의 가르침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향한 여정의 올곧은 길을 일깨워주는 북극성과 등대를, 인간이 되어 오신 하느님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가르침 안에서 아버지 하느님을 만나고 그분의 사랑을 깊이 체험할 수 있어야 합니다. 김 추기경께서는 “그리스도인이란 무엇인가? 하느님은 사랑이시며, 우리 희망의 전부임을 굳게 믿는 사람이다. 그리고 그분이 희망을 이뤄 주기 위해 우리를 지극히 사랑하고 계심을 믿는 사람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느님 안에서 누려야 할 영원한 삶에 비추어 볼 때, 지금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금보다, 많은 순금보다 더욱 보배로우며 꿀보다 생청보다 더욱 달다네.”(19,11)라고 노래되는 주님의 가르침에 따라 사는 것입니다. 신앙의 여정 안에서 “주님, 저의 반석, 저의 구원자시여 당신 앞에 드리는 제 입의 말씀과 제 마음의 생각이 당신 마음에 들게 하소서.”(19,15)라고 노래해야겠습니다. 매 미사 시작 때에 돌아보게 되는 생각과 말과 행위가 주님의 가르침에 더욱 일치하는 삶이 되어야겠습니다.

이어서 함께하는 복음묵상입니다.

버디 영화(Buddy Movie)
4월 6일 사순 제5주일·요한 11,1-45

흔히 ‘동료 구조 영화’라고 불리는 버디 영화(Buddy Movie)는 남자 배우 두 사람이 짝을 이뤄 출연하는 영화를 말합니다. 물론 그 내용은 남자들 사이의 진한 우정입니다. 그 예로 폴 뉴먼과 로버트 레드포드 주연의 영화 <내일을 향해 쏴라>처럼, 일반적으로 버디 영화는 두 배역의 직업이나 성격이 비슷한 특징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최근에는 <델마와 루이스>와 같은 여성들의 우정을 다룬 내용이나 쫓기는 자와 쫓는 자가 나누는 묘한 우정을 다루는 경우도 있지요.

사순 제5주일, 우리는 생명을 건 두 사람의 우정을 그린 버디 영화를 복음 말씀으로 듣게 됩니다. 나자렛 사람 ‘예수’와 그가 사랑한 친구 ‘라자로’가 주연을 맡은 요한 복음 11장 1-45절입니다. 그야말로 이 영화, 아니 이 생명의 말씀은 눈물 없이 볼 수 없는 진한 감동과 죽었던 이가 다시 살아나는 놀라움을 선사합니다. “주님, 주님께서 여기에 계셨더라면 제 오빠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라자로의 동생 마르타와 마리아가 예수께 이렇게 매달리자 예수님도 평상시와 다르게 비통한 심정에 잠겨 무덤으로 가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돌을 치우라고 하시며 친구를 부르시지요. “돌을 치워라.” 이처럼 라자로의 죽음은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중요한 사건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당신의 죽음을 얼마 남겨 두지 않으신 상황에서 죽은 라자로를 소생시키는 것은 표징이었기 때문입니다. 즉 부활은 죽음에서 생명에로, 어둠에서 빛으로, 육에서 영으로의 비약, 넘어섬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안에 있는 부활을 가로막는 돌, 즉 지극히 이기적이고 인간적인 요소를 살펴보면서 내가 넘어서야 할 걸림돌이 무엇인지 곰곰이 생각해 보아야 하지 않을까요?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또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너는 이것을 믿느냐?” 그래서인지 예수님의 이 질문이 여전히 귓가에 맴돕니다.
 
묵상 :  절망의 자리에 희망을, 어둠의 자리에 빛을 가져오는데 장애가 되는 나의 돌은 무엇인가요?

구석(九錫)
4월 13일 주님 수난 성지 주일·마태 26,14-27,66 또는 마태 27,11-54

고대 중국에서는 천자(天子)를 보좌하여 나라를 다스리고 백성을 이끄는 황제의 권위를 드러내기 위해서 갖추어야 할 9가지가 있었다고 합니다.

①금수레를 타는 일(물론 부장 수레가 또 한 틀 있어야 함)
②면류관을 쓰고 곤룡포를 입는 것
③옷깃에 옥을 달아 움직일 때마다 아름다운 소리가 나게 하는 것
④거처하는 집에 붉은 칠을 하는 것
⑤천자가 거처하는 궁에 신을 신고 출입하는 것
⑥300명의 특별 친위대를 거느리는 것
⑦금도끼, 은도끼를 들어 왕의 의장을 갖는 것
⑧붉은 활 한 벌에 화살 열 대, 검은 활 열 벌에 화살 천 대를 가지고 있는 것
⑨검은 수수로 빚은 향기로운 술을 사용하는 일. 그래서 사람들은 이를 “구석”(九錫)이라 말하지요.

“다윗의 자손께 호산나!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은 복되시어라. 지극히 높은 곳에 호산나!”(주님의 예루살렘 입성 기념식 복음, 마태 21,1-11) 그렇습니다.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그분은 적어도 그 순간만큼은 이스라엘 군중들에게 왕이었습니다. 중국의 황제처럼 ‘구석’을 온전히 갖추시지는 못하셨지만, 금수레 대신 어린 나귀를 타고 입성하십니다.

오늘부터 성주간이 시작됩니다. 그때처럼 우리도 나뭇가지를 들고 행렬을 합니다.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기념하기 위해서이지요. 그런데 우리는 예수님의 행렬에서 무엇을 보고 무엇을 환호하는 것일까요? 고통을 이겨내는 유일한 방법은 고통에 담긴 의미를 믿는 것이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고통은 희망과 함께 암수한몸인 자웅동체라서 그렇습니다. 따라서 십자가에서 고통을 당하고 죽음을 당하신 주님께서 부족한 우리를 위해 “영광을 차지하게 되리라는 희망”(콜로 1,27)이 되심을 이 거룩한 주간에 묵상해야 할 것입니다.

묵상 : ‘성주간’은 그 자체로 우리를 거룩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주님과 함께 하고자 자기중심의 삶을 내놓을 때 거룩해지는 것입니다.

“보았나, 십자가의 주님을? 알렐루야, 노래하자!”
4월 20일 예수 부활 대축일·요한 20,1-9

교구장 비서로 근무하던 2년 전, 저(서울 대교구 성서 사목부 박기석 신부)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예루살렘에 가보았습니다. 물론 교우들과 함께 하는 성지순례는 아니었고, 아시아 지역 주교들을 위한 연수회에 참석하시는 교구장님을 수행하는 일로 가게 된 것이었습니다. 그동안 성지순례 경험이 전혀 없었던 제게는 참으로 좋은 기회였지요. 그때 체험한 일입니다. 주님 부활의 그날 마리아 막달레나가 그랬듯 이른 아침 동이 트기 전 부지런히 교구장님과 함께 둘이서 ‘예수 무덤 성당’(Church of the Holy Sepulcher)에 가게 되었습니다. 노출된 공간이기에 성가를 부를 수 없는 막달레나 제대 주변을 보고, 십자군 경당에 가 보니 성지순례 중인 우리나라 교우들이 미사를 드리고 있었습니다.

‘보았나, 십자가의 주님을, 보았나, 매 맞으신 주님을….’ 이어서 작은형제회 수사의 안내로 프란치스칸 성찬 경당에 가 보니 또 다른 우리나라 교우들이 미사 중이었습니다. ‘알렐루야, 노래하자! 기쁜 때가 왔도다.’ 그때야 저는 알았습니다. 이 성당의 또 다른 이름이 ‘예수 부활 성당’이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 옛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골고타 언덕, 아리마태아 출신 요셉이 자기 소유의 무덤에 예수님의 시신을 안치했던 그 무덤 위에 이 성당이 세워졌지만 결국 그 장소는 하느님께서 어둠과 죽음의 세력을 물리치시고 당신의 아드님을 일으키신 부활의 장소였던 것입니다. 분위기상 전혀 맞지 않는 두 성가가 같은 장소에서 불리는 ‘불협화음’에 당황하였지만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은 명백해졌습니다.

삶과 죽음은 서로 떨어질 수가 없지요. 어쩌면 여전히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에 대한 성경 말씀을 온전하게 깨닫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요한 20,9) 하지만 머리로 깨닫지 못한다면 몸으로 깨우쳐야 합니다. 베드로와 요한처럼 예수님이 계시지 않는 빈 무덤으로 들어갑시다.(요한 20,8) 세례를 받고 신자가 되었다 해서 예수님을 알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죽음과 부활이 공존하는 그분 무덤으로 들어가야 그나마 조금 알게 될 것입니다.

묵상 : 진정한 그리스도 신앙인이 되기 위해 우리가 찾아 들어가야 할 예수님의 무덤은 무엇일까요?                                             
                                                        

토마스와 에우티코스
4월 27일 부활 제2주일·요한 20,19-31

주일미사에 참석하지 않은 자와 비록 몸은 왔지만 마음은 다른 곳에 가 있는 자 중에 그나마 누가 더 나은 신앙인일까요?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그날 저녁, 그분은 당신 제자들에게 “평화가 너희와 함께!” 하시며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숨을 불어넣으시며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주시지요. 그런데 그 자리에 ‘토마스’가 없었습니다. 주님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직접 보고 자신의 손가락을 넣어 보고 또 옆구리에 자신의 손을 넣어 봐야만 믿겠다는 고집불통 토마스입니다. 그런 그에게 주님께서 다시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그로부터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이라는 신앙고백을 받으시지요. 주일미사에 참석하지 않았던 토마스는 주님으로부터 다음과 같은 훈시를 받습니다.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이제 사도행전을 봅니다. 어느 밤, 바오로 사도가 트로아스에서 설교를 하던 중이었습니다. 자정이 넘도록 오랜 시간 강론을 하게 되었지요. 바로 그때 ‘에우티코스’라는 젊은이가 졸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창틀에 걸터앉아서 졸다 보니 창밖으로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그 높이가 삼층이었으니 당연히 죽었습니다. 하지만 바오로 사도는 그를 죽음에서 살려내십니다. 그리고 다시 성찬례를 거행하고 밤새 설교를 하지요.(사도 20,7-12) 자, 그렇다면 최종결과가 나왔네요. 그놈이 그놈이요, 도토리 키 재기라 무승부입니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입니다. 토마스는 그 후에 주일미사에 한 번도 빠진 적 없이 지내며 순교하셨고, 에우티코스는 그 후에 한 번도 미사, 특히 강론 시간에 졸지 않았다고 합니다. 교우 여러분들은 어떠십니까? 부활은 언제나 믿는 사람들의 몫이기에 주일미사의 참여유무와 미사 중 태도는
여러분들의 마음 자세에 달려 있음을 꼭 아셔야 합니다. “뭐라고요? 바오로 사도처럼 강론을 길게 하지 말라고요?”

묵상 : 사순 시기가 끝나며 자칫 해이해질 수 있는 신앙을 다시 곧추세웁시다!

하느님 계시의 전달Ⅰ
(계시 헌장 7~8항)

‘새로운 시대, 새로운 복음화’의 실현을 위해 성경 말씀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도록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 ‘하느님의 계시에 관한 교의 헌장’을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 해설총서-계시 헌장」을 참고로 하여 함께 읽어가겠습니다.

✚ 7항 _ 복음 선포자인 사도들과 그 후계자들 ‘하느님께서는 온 인류의 구원을 위하여 계시하신 모든 것이 영구히 온전하게 보존되고 모든 세대에 전해지도록 자비로이 배려하셨습니다.’(7항) 계시는 선택된 몇 사람에게 주어진 것인 동시에 모든 사람을 위해 마련된 것입니다. 구약 시대에는 예언자들을 통해 그 시대의 당신 백성들에게 거룩한 당신의 뜻을 보여주셨고, 신약 시대에는 당신의 외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심으로써 모든 세대를 위해 당신의 뜻을 온전하고 완벽하게 전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모든 계시를 자신 안에서 성취하신 예수님께서는 사도들을 통해 하느님의 은총과 예언의 성취, 그리고 복음과 규범들을 모든 이에게 전하게 하셨습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뒤에 오는 시대를 위해 당신 스스로는 아무런 글도 쓰지 않으셨으며, 제자들에게도 무언가를 쓰도록 요구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것을 세세하게 설명하지 않으셨지만 중요한 가르침만은 분명하게 말씀하셨고, 그 중요한 가르침인 복음의 모든 진리를 전파하도록 사도들에게 명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명령은 충실히 이행되었습니다. ‘사도들은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 그리고 그분과 함께한 공동생활을 통해 깨달은 것과 성령의 도움으로 알게 된 것을 설교와 모범과 제도로써 우리에게 전달해 주었습니다.’(7항) 사도들은 예수님의 계시를 받은 대로 전하면서 성령의 영감 아래 계시를 완성하는 데에 적극적인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사도들과 그의 직제자들은 성령의 감도로 구원의 소식을 성전(聖傳)과 성경(聖經)을 통해 다음 세대에게 전하였습니다. 사도들은 교회 안에 복음이 영구히, 온전하게, 또 생생하게 보존되도록 주교들을 후계자로 세워 교도직의 자리를 넘겨주었습니다. 지상에서 순례하는 교회는 하느님의 참모습 그대로를 볼 수 있는 그날까지(1요한 3,2 참조) 성전과 성경을 통하여 하느님을 바라보며 그분의 모든 것을 받고 있습니다.

✚ 8항 _ 성전
영감 받은 책들(성경) 안에 특별한 방식으로 표현되어있는 사도적 설교는 세상 종말까지 지속적인 계승으로 보전되어야 했습니다. 보전되어야 할 것은 계시의 가르침만이 아니라 교리,
생활, 전례 등 교회의 모든 것을 포함합니다. 이를 거룩한 전통, 즉 성전(聖傳)이라 합니다. 사도들은 자신들이 받은 것을 신자들에게 전해 주면서, 설교나 서간을 통해서 그들이 배웠던 전통들을 굳건히 지키며(2테살 2,15 참조) 그들에게 전해진 신앙을 위하여 투쟁하라고 권유합니다. 사도들에게서 이어 오는 성전(聖傳)은 성령의 도우심으로 교회 안에서 발전합니다. ‘전해진 것들(성전)과 말씀들(성경)에 대한 이해는 마음 깊이 그것을 새겨 간직하는 신자들의 명상과 공부로써, 영적인 것들에 대한 좀 더 깊은 인식을 통해 쌓이는 경험으로써, 그리고 주교직 계승을 통해 확고한 진리의 은사를 받은 이들의 설교로써 증진됩니다.’(8항)

거룩한 교부들은 성전(聖傳)이 살아 있음을 증언하면서 믿고 기도하는 교회의 관습과 생활 안으로 성전의 풍요로움이 흘러 들어온다고 가르칩니다. 성전(聖傳)을 통해 교회는 성경의 온전한 정경(正經)을 인식하게 되었고, 또한 성전으로 성경은 한결 더 깊이 이해되고 교회 안에서 그 힘을 발휘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하느님께서는 여전히 교회와 끊임없이 대화하시며, 성령께서는 복음의 생생한 목소리가 교회를 통하여 세상 안에 울려 퍼지도록 하십니다. 또한 신자들을 온전한 진리 안으로 이끄시며 그리스도의 말씀이 그들 안에 풍성히 머물도록 하십니다.(콜로 3,16 참조)

1. ‘계시’에 대한 설명으로 올바르지 않은 것은 무엇인가요?
① 선택된 몇 사람에게 주어진다.
② 예언자를 통해서만 당신의 뜻을 보여주셨다
③ 모든 사람들을 위해 마련되어있다
④ 하느님의 온 인류 구원을 위한 자비로운 배려이다

2. 예수님께서 행하신 복음 전파 방법은 무엇인가요?
① 글을 써서 직접 책을 만드셨다
② 모든 것에 대하여 세세하게 설명하고 기록하셨다
③ 중요한 가르침을 분명하게 말씀하시고 복음의 모든 진리를 전파하도록 사도들에게 명하셨다
④ 제자들에게 행적을 글로 남기도록 요구하셨다

3. ‘성전(聖傳)’에 대한 설명으로 적합하지 않은 것은 무엇인가요?
① 성전은 믿고 기도하는 교회의 관습과 생활 안으로 흘러들어온다
② 성전으로 교회는 성경의 정경을 분명히 인식하게 되었다
③ 성전으로 성경을 더 깊이 이해하게 된다.
④ 성전과 성경은 아무런 관계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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