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착한 목자다
‘나는 착한 목자이다!’라고 밝히신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오늘 교회에서는 성소주일을 지냅니다. 착한 목자를 기억하며 양떼를 돌보시는 분은 주님이시지만 많은 이들은 성직자들과 수도자들을 기억하며 기도하는 날이라 생각하기도 합니다. 맞는 말이기도 하지만 그보다 더 큰 의미를 담고 있는 날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서 하느님의 일을 수행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지를 찾아내기 위해 1964년에 제정 된 ‘성소주일‘이기에 목자는 꼭 성직자들 뿐 아니라 우리 모두의 몫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소(聖召)라는 말은, 말 그대로 거룩한 부르심을 뜻합니다. 그러나 부르심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고 그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것을 포함하는 말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끊임없이 부르시는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삶이 믿음의 기초이기에 성소는 우리 모두의 현실적 문제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성소라는 말은 세상에 살면서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모든 사람들의 문제 아니겠습니까? 오늘 성소주일은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한 사람을 위해서 특별히 기도하는 날이기도 하지만 우리의 성소도 함께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과연 우리에게 하느님으로 부터 어떤 부르심을 받았을까요? 하느님께서 성직자와 수도자들 말고 과연 우리 평신도들을 부르시고 계시기는 한 것일까요? 우리 신앙생활의 삶의 변화를 위해서는, 현실에 묻혀 바쁘게 살더라도 우리가 꼭 던져야 할 질문입니다.
성소주일을 설명하는 전통적인 표현에는 ‘양과 목자’의 관계를 이용하여 설명합니다. 농업을 주업으로 삼았던 우리 민족들에게는 매우 생소한 관계 설정이라 그런지 나는 개인적으로 목자와 양의 설정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목자의 사명은 양이 좋은 풀을 안전한 장소에서 먹을 수 있도록 이끌고 그러한 장소를 확보해주는 것이겠지요. 목자가 이렇게 목자의 일을 잘 할 때 그 보호를 받은 양은 목자에게 젖을 주고, 고기를 주고, 가죽을 주는 설정 이게 내가 싫어하는 표현입니다. 양을 잘 키우고 보살펴서 결국 잡아먹는 목자라면 거기엔 사랑이 없고 단지 자기의 욕심을 채우려는 모습만 보이기 때문이지요. 교회가 어떤 이유에서든 양들을 잡아먹고 가죽을 벗겨 파는 곳이 되어서는 안 되지 않겠습니까? 물론 세상에는 훌륭한 사제나 교회의 지도자들이 계시고 참으로 착하고 거룩한 목자의 모습으로 사시는 분들이 많지요. 그런 분들을 욕하고자 함이 아니고, 단지 표현적인 설정을 지적하고자 함입니다. 또 목자를 따르는 양의 모습이란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고 목자가 시키는 대로 하여 자발적이지도 않고, 또 적극적이지도 못한 양들, 이것이 우리가 생각하는 교회의 모습은 아니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오늘 복음에서 착한 목자의 예수님께서 하시려는 말씀은 분명 커다란 축복입니다.
오늘 들은 복음말씀에, 예수님은 ‘나는 착한 목자’라고 하시며, 목자의 목소리를 알아듣는 양들도 있고 아직 듣지 못한 양들도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목소리를 알아듣는 양들은 무슨 뜻일까요? ‘나는 양들을 위해 목숨을 바친다.’하고 말씀하신 예수님의 삶을 따라 살던지 우리가 사는 세상의 가치에 따라 지극히 개인적인 세상을 만들어 나만 위해 사는 것의 차이는 착한 목자의 목소리를 듣고 그분의 양떼가 되었는지 아니면 아직도 듣지 못하여 그분의 우리가 아닌 내 우리에 갇혀 사는 양이 되는 것의 차이가 아닐까요? 착한 목자가 된 이유가 그분의 목숨을 내 놓았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신 오늘의 복음 말씀처럼, 우리 모두가 가정 안에서, 직장 안에서, 만나는 사람들 앞에서 착한 목자처럼 자기 목숨을 내 놓는 죽도록 사랑을 살아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런 일이 가능하다고 말하려면 아직 예수님의 목소리를 듣지 못한 이웃들에게 그분의 목소리가 들리도록 우리가 예수님의 삶을 살아내야 합니다. 사실 신앙인으로 산다고 해서, 세상에 있는 고통과 힘겨움, 삶을 위협하는 것들에게서 보호를 받으며 사는 것은 아닙니다. 신앙인으로 산다는 것은 세상을 기준으로 사는 사람들과 똑같이 두려움과 곤경을 겪지만 두려움과 곤경 너머에 있는 희망을 볼 줄 아는 은총의 사람들입니다. 해서 그분의 목소리를 듣고 따라간다는 의미는 그저 수동적으로 앉아서 시키는 것만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목숨을 바쳐 사랑하신 덕에 착한 목자가 되신 그분의 사랑을 함께 살아내는 적극적 삶(Com-passion)이여야 합니다.
오늘은 하느님의 부르심에 따라 자신의 삶을 봉헌하면서 사는 사제와 수도자, 그리고 그 길을 준비하는 신학생들과 성소에 응답한 사람들을 위해서도 함께 기도하는 날입니다. 안타깝게도 아직 우리 성당에서는 아니 시카고 전체에 한인 성직 성소와 수도 성소가 없습니다. (제가 시카고 교구에서 서품 받은 유일한 한인입니다.) 따지고 보면 사목자로써 젊은이들에게 모범을 보여주지 못한 내 잘못이 가장 클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 자녀들의 미래를 위해서라도 또 교회의 미래를 위해서 성직자와 수도자가 나올 수 있도록 우리 스스로도 교회에 봉사하는 모범을 보이며 살아가는 것도 매우 중요합니다. 그리고 자녀들이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도록 격려해 주고 기도하는 공동체가 된다면 멀지 않은 미래에 우리 성당에서도 신부님이나 수녀님들이 탄생하게 될 것입니다. 세상이 정한 가치관만 따지는 사람들로써 오늘 복음의 언어로 삯꾼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라면 기도가 세상의 삶을 바꾸는데 아무런 힘도 되지 못한다고 믿으며 어떤 기도도 하지 않겠지만, 하느님의 사랑을 믿고 사는 착한 목자의 양들이라면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청하는 사람으로 기도하며 하느님의 뜻을 살아갈 것입니다. 모두 잘 아시는 말씀이지만, 젊은 아이들은 어른들을 보며 배워 삽니다. 우리가 교회에 봉사하고 우리가 하느님의 사랑을 살아낼 때 젊은이들도 수동적인 신앙에서 하느님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적극적 신앙을 배워 살아갈 것입니다. 착한 목자이신 예수님의 삶을 따라 살라고 재촉하는 오늘 우리를 거룩하게 불러주신 하느님의 부르심에 어떻게 응답하고 사는지, 신앙인의 삶에 충실하도록 서로를 위해 봉사하고 사랑하며 미래의 성소자들을 위해 특별한 기도를 바치는 공동체였으면 합니다.
– Fr. 김 두진(바오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