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지 못하는 새

준비하지 못한채 떠밀려 하게 된 은퇴는 정말 미처 생각해보지도 못한 희한한 경험의 기회를 가져다 주었다.
순전히 자신의 탓인줄 알면서도 정확하게 쥐꼬리보다 조금 더 짧은 사회보장청에서 보내주는 연금은 매달의 마지막 한 주일을 어떻게하면 새 것이 올때까지 슬기롭게 넘길 것인가를 곰곰이 기도하는 마음처럼 지내야하는 버릇같은 일상을,  일상과도 같은 버릇을 제공해주고 있다.

창피한 줄 알면서 창피한 얘기를 구태여 하려는 것은 결코 남의 관심이나 동정을
구하려는 노력에서가 아니다.

바퀴를 돌리고 있으면서도 그 바퀴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다람쥐같은 생활 모습속에서 긍정적인 사고의 틀을 찾아내는 동기를 나누고싶어서이다.

바다의 가장자리에서 물고기를 먹이로 찾을 수 있었던 펭귄은 아마도 날던 새였을 것이다.     더 이상 날지않고도 살게된 그 새는 날개가 퇴화해여 쫏겨야하는 위급상황을 만나도 하늘로 솟을 수 없게되었을 것이다.

닭도 날던 새였을 것이다.
주인 마님이
그 새를 마당안에 머물러 있게 해 두었다가 강남갔던 사위가 돌아오거나 영감의 환갑 잔치때 목을 비틀려고 하는 심사로  아까운 모이를 던져주는 것인데
그 속셈도 모르고 마당안에서 얻어먹으며 안주하던 새, 그 닭은 이윽고 때가되어 마님이 잡으려고 다가와도 하늘로 솟을 수 없게되어 식탁에 오르게 되었을 것이다.

요즘 사람들이 예쁜 옷도 사주고 눈비 오는 날 신으라고 장화까지 사 신기고 때 마춰
미장원엘 데려가는 PET.

호강이 넘치다가 못해 나같은 못난 사람들의 시샘도 사는 PET.

영양상태가 넘치고 흘러서 이제는 당뇨병과 과체중으로 주인을 걱정시키는 PET.

그들은 본래의 야성을 잃어 스스로는 살아가는 법을 상실하였다.

                                                  * *

본의였든 사고였든 그 쥐꼬리같은 사화보장 ? 연금에게 포로가 되어 그 안에 안주하며 쳇바퀴를 돌리고있는 나 자신을 발견하고는 소름 끼치는 놀라움이 나를 두드려 깨우고 있었다.

내 이름이 PET이 아닌데 왜 나는 던져주는 먹이만을 기다리고 있단 말인가?
스스로의 모습에 부끄럽고 창피하고 모멸감과 자괴감이 감싸고 있었다.

날개를 퍼뜩이자.
그리고 날자.

실제로는 기력이 쇠잔하여 하늘에 솟지 못한다면 그게 뭔 대수인가?

몸부림치는 시늉을 해도 현실은 지금의 상황에서 벗어나는 일을 허용하지 않는다
한들 그것이 무슨 대수인가?

야성은 커녕 광야에 들어서기도 전에 잡혀 넘어진다 한다고 그 게 뭐 대수인가?

주는 먹이에 안주하지 말고 스스로 서 보자는 그 마음을 잃지 말자.
용기를 잃지말자.

창조주는 나를 노예가 되라고 내신 것이 아니다.

영국의 물리학자, 스테판 호킨스는 걷지도 못하고 의자에 앉아 생활하면서도
그의 마음은 온 우주를 헤엄치고 있지않은가?

톨스토이와  또스또엡스키가 단순히 위데한 문호의 경지를 뛰어 넘어 훌륭한 것은
그 엄격하고 부패에 안주했던 제정 러시아의 짓눌린 서민들에게 언제나 하느님안에서
좌절하지말고 용기와 희망을 가지라고 격려해 주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 평범하고 이미 모두가 알고있었던 진리의 새로운 발견은 큰 소득이 되고 있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더 소중한 소득은 자신이 처한 현실에 불만하고 나약해지고 의기소침해 지려는 자신을 그 현실환경에 상관없이 그로부터 자유함을 마음안에 얻을 수 있다는 자신감의 회복일 것이다.          

은행에 예금통장을 만들어 그 안에 현금을 묻어두면 시간이 가면서 기술적으로 는
돈을 인출하지 않고도 잔고가 줄어든다는 이치는 은행에서 주는 이자가
인프레이션을 따라잡지 못하기 때문이다.

크리스챤의 신앙도 같은 이치를 적용할 수 있지 않을까?

주일미사에 시간 마추어 참례하고는 쏜살같이 빠져나가는 신앙생활.

이렇게 바쁜데 어느새 죄를 지었다고 내가 화해성사를 위해 사제앞에 무릎을 꿇어야 하느냐고 스스로를 위로하며 몇년전에 성사를 보았는지도 가물 가물한 신앙생활.

교회의 봉사란 심청전에 나오는 그 할아버지같은 이들이나 하는 것이라며,
‘ Those things are NONE of MY BUSINESS. ‘라는 신앙생활.

이런 모습들도 세월이 흐르면서 언젠가 신앙의 날개를 잃게되는 삶은 아닐까?

                                                 * *
사돈 남 말하듯이  부끄러울 신앙생활을 한참이나 지적하다 보니 결국 다 내 모습만 들어내 보이고 만것같아서 또 한번 부끄러워진다.

                                                 * *

창을 두드리는 빗방울을 내다보노라니 어느 시인의 시가
마치 하느님을 그리워하는 것 같다는 생각에 여기 옮겨 나누려 합니다.

                                          ( 가슴에 내리는 비 )
내리는 비에는 옷이 젖지만
쏟아지는 그리움에는 마음이 젖는군요
벗을 수도 없고 말릴 수도 없고
비가 내리는군요
내리는 비에 그리움이 젖을까봐  마음의 우산을 준비했습니다

보고싶은 그대여
오늘같이 비가 내리는 날은 그대 찾아 나섭니다
그립다 못해 내 마음에도 주룩 주룩 비가 내립니다

비 내리는 날은 하늘이 어둡습니다
그러나 마음을 열면 맑은 하늘이 보입니다
그 하늘은 당신이니까요

빗물에 하루를 지우고  그 자리에 그대 생각을 넣을 수 있어
비 오는 날 저녁을 좋아합니다
(중략)
내리는 비는
우산으로 가릴 수 있지만
쏟아지는 그리움은 막을 수가 없군요
폭우로 쏟아지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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