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야구 뉴스를 듣습니다.
일본 팀에게 지니까,’ 숙적 일본에게 분패’ 했다며 분해 하고,
이기니까, 또 한 번 ‘숙적 일본을 완파’ 했다며 좋아합니다.
저도 물론 좋아했지요. 길길이 뛰며 이긴 것을 기뻐했습니다.
뛰면서 좋아하다가 좀 열이 내려서 앉아 생각합니다.
왜?
이겨도 져도 그들은 언제나 숙적이어야만 하나?
물론 저도 숙적까지는 아닐지 몰라도 일본! 그러면 닭살이되어 싫어집니다.
3.1.운동때 태극기 날리며 항일을 해보지도 못했으면서 그렇게 쓰라린 경험을 한 어른들로 부터 듣고 책에서 보고 위안부로 고초를 겪은 할머니들의 눈물을 통해서 느낄 때면,
맛있게 먹던 스시 마끼가 거꾸로 올라오는 것 같은 불쾌감을 갖게되고 화가 납니다.
그래서 그들을 우리는 ‘멀고도 가까운 나라, 가깝고도 먼 당신’ 이라는 생각을 고정관념처럼 지울 수가 없지않나 싶습니다.
나라와 나라끼리만 그럴라고요?
사람의 관계를 생각합니다.
가령 한 가정의 부부가 심하게 다투게 되면 가장 최소의 단위인 둘로 나뉘고 맙니다.
‘ 너는 너, 나는 나’ 이지요.
때로는 ‘너는 네 인생, 나는 내 인생’ 산다며 고무신 바꾸어 신는 불행한 데까지도 갑니다. 그런데 그러던 집안도 이웃과 다툼이 있게되는 날엔 싸우던 부부도 한 통속이 되어 박자를 마추어 가며 뭉쳐 이웃과 침을 튀기게 될테지요.
소위 ‘공동의 적’ 앞에 하나로 뭉치는 것이지요.
이런 논리로 거슬러 가서 보게되면 모래알 같고 콩가루 집안같던 민족도 나라단위로, 민족단위로 어느새 하나가 되어 손바닥 두드려 대며 ‘대-한-민-국, 쨘-쨘-쨘-쨘’ 어쩌구 해 가며 언제부터 그리 됐는지 붉은 악마가 왔다고 악을 쓰는 걸 보며 저도 또 따라하지요.
지금의 지구촌 분쟁이 다 그런 꼴 아니겠습니까?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이라크의 부족간 다툼도 다 ‘끼리 끼리’만 살아보겠다는 심산에서 비롯된 다툼들이다 여겨집니다.
예수님이 우려하시던 일이 바로 지금 우리들이 벌이고 있는 이런 꼴이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
세상이 끝을 향하여 가게되는 ‘재난의 시작'(마태24.6)의 징조가 이런데서 비롯되나 합니다.
우리보고 ‘조센징’하며 업신여기던 ‘니혼징’이 밉고 싫지만 예수님은 묵은 앙금일랑 털어내고 용서하라 하십니다.
원수마저도 용서하라 하십니다.
정말 예수님은 절 미치게 하시네요.
원수는 고사하고 제 1 촌되는 이웃도, 또 밖에 들락거릴 때마다 마주치는 아파트 이웃도 심지어 하느님께 미사드리며 기도한다고 가는 성당에 가서도 형제가 밉고 자매가 보기싫은 저더러 원수를 사랑하라 하시니 “How can I do that, my Lord?”
세상엔 어려운 일도 많지만 그 중에서 가장 어려운 것이 싫고 미운 사람을 용서하는 일 아닐까 합니다.
그래도 해야지 어쩌겠습니까?
네가 감히 크리스챤이라 하려거든 ‘너를 버리고 네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하시는 주인의 명을 거역할 수는 없어 보입니다.
우리가 먹고 사는 일 하나만으로도 바쁘고 정신이 없는데 틈을 내어 성경공부를 하는 일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닙니다.
그런데 하느님 말씀을 머리에 채우지 않고서 하느님께 가까이 다가 가는 일도 모순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정말로 정말로 더 어려운 일은 머리에 채워진 말씀을 가슴으로 내리는 일 같습니다. 개인적인 체험으로 보면 지금까지 여러 해동안 나름대로 머리에 우선 채워본다고 들락 날락거려 보았지만 먼지만 날리고 다녔지 자꾸만 흘러나가 채워지지도 않을뿐 더러 조금 채워진 것이 있다해도 가슴은 커녕 눈썹 아래로도 내려가지 않습니다.
그러니 말씀이 가슴으로 내려가지 않고서야 무엇으로 이웃에게 하느님의 사랑을 실천해 볼 꿈이나 꾸어 볼려는지 아득하기만 할 뿐이지요.
아무리 아득하고 멀다해도 그 길이 가야할 길이란다면 매일 한 발짝씩이라도 가기를 해야겠다고 십자가에서 내려다 보시는 주님을 바라며 이 사순절을 맞으며 더욱 회개하고 거듭나야겠다고 스스로에게 다짐해 봅니다.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