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래알 같이 많은 사람들…
모래알 같이 많은 사람들, 하필이면 당신이었나? 미워서도 아니고 싫어서도 아니다. 아주 오래전 어렸을 때 잠자기 전에 듣던 라디오 연속극 주제가다. 정작 어떤 내용의 연속극이었는지 하나도 생각나지 않으면서 주제가의 멜로디가 아직도 흥얼거려지는지 것은 정말 모를 일이다.
오래 살아왔다고 말 할 수 없지만, 마냥 짧지도 않은 세월을 살아오면서 만난 많은 사람들과의 만남을 생각해 본다. 만남이 오래된 지속된 사람들도 있고 만남이 짧게 끝난 사람들도 있다. 대부분 오래가는 사람들은 내게 도움을 주고 도움을 받는 사람들이다.
오늘 복음을 읽으면서 얼마나 많은 예언자가 이스라엘에서 죽어갔는지를 생각해 내면서 나는 얼마나 많은 예언자들을 죽이고 있는지를 생각해 냈다. 해서 내게 도움을 주던 사람들에게 내 뜻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나를 간섭한다는 이유로 그들을 멀리하고 잊어버렸던 냉정함에 가슴이 무겁다.
구약의 예언자들과 신약의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서 맡겨 주신 사명을 수행하였기에 백성에게 배척을 받고 죽임을 당하는 수모를 겪는다. 오늘 예수님은 상속자의 예를 들어가며 수석사제들과 이스라엘 백성의 원로들에게 하느님의 나라의 상속자인 그분을 죽이려는 그들의 음모를 들춰내신다.
얼마나 많은 예언자들을 내가 만난 모래알 같이 많은 사람들 중에 만났을까? 닫힌 마음을 열어준 친구들의 우정도 옳은 소리를 해 주었던 신자들의 따끔한 질책도 모두 예언자들의 외침이었음에도 바늘구멍보다도 더 작을 자존심으로 귀를 막고 머리 흔들며 외면해 왔을까? 아니 얼마나 자주 그들에게 돌멩이를 던지며 내가 옳다는 쳇바퀴 같은 빈 소리만 울려댔을까?
사순 시기는 회개하는 시기임에도 오늘 성당에 앉아 있으며 힘없이 사도 바오로의 독백만 중얼거리고 있었다. “하느님께서는 내 몸에 가시를 주셨습니다. 그 가시는 나를 줄곧 찔러 대 내가 자만하지 못하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이 일과 관련하여 나는 그것이 나에게서 떠나게 해 주십사고 주님께 세 번이나 청하였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너는 내 은총을 넉넉히 받았다. 나의 힘은 약한 데에서 완전히 드러난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그리스도의 힘이 나에게 머무를 수 있도록 더 없이 기쁘게 나의 약점을 자랑하렵니다. 내가 약할 때에 오히려 강하기 때문입니다.” 고린토 후서 12 7-10
오늘 내가 성당에 앉아있으며 들은 이 말씀도 나를 살리려는 그분의 말씀일까? 가시로 찌르는 것 같은 고통스러운 내 약점이 정말 나를 겸손하게 하려고 그분께서 주신 것일까? 마음은 간절한데 몸이 말을 안 듣는 이 어두움도 그리스도의 힘이 내게 머무를 수 있게 하시려는 그분의 배려일까?
모래알 같이 많은 사람들을 오늘 하루 안에 만나진 못했지만 성당에 앉아 오늘 복음 말씀과 상관없을 사도 바오로의 체험을 내 것으로 체험하며 감사함을 간직했다면, 그저 혼자만의 독백일까? 회개의 시작일까? 약함에서 강함을 얻는 은혜일까? 성주간을 앞 두고 다시 한 번 하느님사랑에 집중해 본다. 나의 약점을 들추어내시는 분이 아니시고 오히려 그 약함을 통해 사랑을 주시는 그분의 놀라운 사랑에 집중해 본다. 성삼일의 전례가 우리게 보여주는 것을 보면서 그분의 사랑에 집중하는 시간이 되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