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21일
사순 제 5 주일 복음 묵상
올 겨울은 눈도 많이 왔고 춥기도 엄청 추웠다. 시카고의 겨울 다웠다. 그러나 나무들이 새로운
옷을 입기 위해 색깔이 변한다. 겨우내 침묵했던 새들도 지저귄다. 그리고 새파란 새싹이 돋아나는 생명의 소리가 들리고 꽃망울이 여물고 활짝 필 채비에 분주하다. 봄에 대한 이야기들이다. 죽은듯한 겨울의 색채에서
생동감 넘치는 봄의 색깔이 즐비하다. 이는 아무도 모르게 떨어진 씨앗 때문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다 안다. 그렇다! 떨어져 죽은
씨앗이 봄을 물들게 한다.
오늘 들은 예수님의 말씀은,
‘사람의 아들이 영광스럽게 될 때가 왔지만’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어야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으므로,’ ‘자기를 버려야 하며,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보전할 것이다.’)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라야 하는데 그것은 떨어져 죽는 밀알과
같은 삶임’을 말하고 있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고
썩어져야만 열매를 맺을 수 있는 것처럼, 예수님의 삶은 그분의 죽음 후, 제자들 안에 많은 열매를 맺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은 유다인들이 보기에는 어리석은 실패였지만, 많은 사람들이 십자가로 인한 밀알의 의미를
알아듣고, 그분의 삶을 배워 실천하기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세상의 눈으로 십자가는 실패와 죽음의 비극이었다. 예수님은 당신의 목숨을 아끼지 않고,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을 실천하다가 죽음을 맞이하셨다. 예수님이 실패의 최후를 맞이하신 것은 그 시대
유대교 사회의 힘 있는 이들이 가르치던 것과는 다른 하느님을 선포하셨고, 그 하느님의 일을
공공연히 실천하셨기 때문이었다. 율법교사와 사제들은 율법의 문자에 얽매여 살았고, 율법을 지키지 못하 면 벌을 주는 엄한 하느님이라
믿었으므로 그들이 믿는 하느님은 자비로운 분이 아니셨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비하고 용서하시는
하느님을 믿고 가르쳤다.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하느님께서 의롭게 여기시는 것을 구하여라.”(마태 6,33). 즉, 자기 한 사람의 목숨만을 소중히 생각하지 말고, 자비하신
하느님에게 신뢰하면서 그 자비를 스스로 실천하여, 하느님 나라에 사는 사람이 되라는 말씀이다. 또 유대인들은 이스라엘 백성만이 그 중에서도 율법을 잘 지키는 유대인들 만이 구원 받을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런 믿음을 거부하셨다. 인간과
함께 계시며, 돌보아주고 사랑하시는 하느님이라는 의미에서 예수님은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셨다. 예수님은 그 아버지이신 하느님의 생명을 이어받아 그 생명이 하는 일을 실천하셨다. 예수님은 병든 이를 고치셨다. 유대교가 말하는
것과는 달리 병은 하느님이 주신 벌이 아니었으므로, 예수님은 이교도인 백인대장의 종(루가 7,1-10) 과 시로페니키아 여인의 딸(마르 7,24,30)도 고치셨다. 예수님의 아버지 하느님은 종교가 다르다고 사람을 외면하지 않으시는 분이시다.
죽도록 사랑한다는 말은 죽을 만큼 사랑한다고 고백하는 것이다. 죽도록 일만했다는 말은 죽을 만큼 열심히 일했다는 뜻이다. 우리말
안에 이렇게 죽음을 자주 강조하는 것은 죽을 마음 없이는 아무것도 이룰 수 없다는 뜻 아닐까 싶다. 신앙의
언어로 밀알이 땅에 떨어져 썩어 죽지 않으면 열매를 맺을 수 없다고 말씀하신 것처럼………
하느님의 자녀로 사는 사람은 자기 주변의 허약한 생명들, 외로운 생명들, 고통 받는 생명들을 특별히 보살핀다. 자기 자신을 위해 열심히 기도하면서, 버려진 자기의
이웃들을 모르는 체하는 것은 예수님을 따라 열매 맺는 신앙이 아니다. 주변의 생명들이 우리와의
인연으로 기뻐하고 행복해야 한다. 그것이 예수님이 하신 일이었다. 오늘 복음의 말씀이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라야
한다. 내가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사람도 함께 있을 것이다.’
봄의 색깔이 희망의 색이 되는 것은 땅에 떨어져 죽은 씨앗
때문이다. 봄이 죽은 생명을 다시 피우는 것처럼 밀알이 땅에 떨어져 썩는 것은 희망이며 부활이다. “죽겠다“는 말을 쉽게 하는 우리다. 우리가 땅에 떨어져 죽는 밀알의 의미를 이해한다면, 자기를
버리고 죽음을 실천함은 참 신앙의 길이고 열매 맺는 삶임으로 알아들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