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마태오 21, 33-43
오늘 복음 말씀은 포도밭과 소작인들의 비유이다.
주인은 소작인들에게 세 명의 종을 차례로
보냈지만, 처음에는 빈손으로 돌려보내고, 다음에는 모욕하고, 마침내
마지막 종은 죽여 버린다. 종들의 파견을 통해 지도자들의
횡포와 거부가 점점 더 심해지는 것을 볼 수 있다.
예언자들 역시 하느님의 소명을 받고 이스라엘 백성과
그 지도자들에게 말씀을 선포하였지만, 그들 또한 비유에
나오는 소작인들의 모습처럼 하느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지 않았고, 자신들의 악행 역시 쉽게 고치려 하지 않았다.
“그
뒤에 또 많은 종을 보냈지만 더러는 매질하고 더러는 죽여 버렸다.” 주인은 자신의 포도밭을 쉽게 포기하지
않고, 끈기와 인내를 가지고 소작인들에게 계속해서 종을 보내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이것은 구약
시대에 이스라엘에 파견된 많은 예언자를 표현하며, 그들의
파견에도 불구하고 성과가 없었음을 나타낸다.
“이제 주인에게는 오직 하나, 사랑하는 아들만 남았다. 그는 마지막으로 ‘내 아들이야 존중해 주겠지’ 하며
아들을 보냈다.” 여기서 사용된 ‘사랑하는 아들’은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신 후 하늘에서 들려온 소리와
같은 표현이다.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마르
1,11) 이제 비유는 정점에 이른다.
주인은, 곧
하느님은 마지막으로 사랑하는 아들, 곧 예수님을 당신의 백성과 그 지도자들에게 보낸다.
하지만 그 결과 역시 예언자들의 경우와 비슷했다. “그러나 소작인들은 ‘저자가 상속자다. 자, 저자를
죽여
버리자. 그러면 상속 재산이 우리 차지가 될 것이다 … 그를
붙잡아 죽이고는 포도밭 밖으로 던져 버렸다.”
비유의 내용은 이제 예수님의 죽음을, 백성의 지도자들에 의한 십자가의 죽음을 표현한다. 여기에서
대조적으로
나타나는 것은 주인과 소작인들의 모습이다. ‘아들이야 존중해 주겠지’라는 주인의 마음은 ‘저자를
죽여 버리자’는 소작인 들의 행동과 너무나도 다르다. 이것을 통해 비유는 예수님의 죽음이라는
역사적인
사실을 바탕으로 하느님의 계획이 거부되는 현실을 이야기한다.
“그러니 포도밭 주인은 어떻게 하겠느냐? “하느님께서 너희에게서 하느님의 나라를 빼앗아, 그 소출을 내는
민족에게 주실 것이다.”(마태 21,43) 이 구절은 이제
하느님의 구원이 유다인들에게서 이방인들에게, 더
나아가 믿음을 간직한 이들에게 옮겨가게 되었다는 근거를
제시한다.
비유는 소작인들, 곧 백성의 지도자들의 악행을 소재로 하지만, 비유에서 드러나는 것은 하느님의 인내와
자애로운 모습이다. 백성의
지도자들이 회개하기를, 그리고 백성이 악행을 버리고 하느님께 돌아오기를
기다리지만 그들의 행동은 그렇지
못했다. 수많은 예언자, 결국에는 당신의 사랑하는 아들까지
파견하는
자애로운 포도밭 주인의 모습은 그 모든 것을 거부하고 자신들 마음대로 행동하는 소작인들의 모습과
대조적으로 표현된다. 이런 의미에서 포도밭 소작인의 비유는 하느님의
구원 역사 전체를
요약한다.
이스라엘을 선택하고 축복하신, 그리고 예언자들을
통해 회개를 기다리고, 예수님의 말씀과 업적을
통해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는 하느님. 그렇기에 이 비유는 하느님과 그 백성과의 역사를 요약하면서
그 안에서 드러나는 인간을 향한 하느님의 사랑과
구원을 위한 하느님의 인내를 역설적으로 표현한다.
비유는 마지막으로 우리에게 익숙한 시편 118편 22-23절의 인용으로 마친다. “집 짓는 이들이 내버린 돌,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네. 이는 주님께서 이루신 일, 우리 눈에 놀랍기만 하네.” 이 시편은 주님의
업적을 찬양하는 노래이고 시편 118편의 처음과
마지막에 표현된 찬양은 포도밭 소작인의 비유에서 찾을 수
있는 핵심적인 가르침과도 일맥상통한다. “주님을
찬송하여라. 좋으신 분이시다. 주님의 자애는 영원하시다.”
(시편 118,1.29)
주님의 자애가 우리 모두와 함께 하시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