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법의 완성

율법의 완성

 

내가 율법이나 예언자들은 폐지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시오.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습니다. 진실히 여러분에게 말하거니와 하늘과 땅이 사라질 때까지, 모든 일들이 이루어 질 때까지 율법에서 한 자 한 획도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 마태오 5:17-18

 

오늘 율법의 완성을 말씀하시는 그분의 뜻이 어디에 있을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율법학자 한 사람이 그들이 토론하는 것을 듣고 있다가 예수께서 대답을 잘하시는 것을 보고 모든 계명 중에 어느 것이 첫째가는 계명입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께서 이렇게 대답하셨다. “첫째가는 계명은 이것이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느님은 유일한 주님이시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님이신 너의 하느님을 사랑하라또 둘째가는 계명은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는 것이다. 이 두 계명 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 (마르코 12:28-31)

 

위에서 말하는 첫째가는 계명은 신명기에 나오는 율법입니다.

너 이스라엘은 들으라. 우리의 하느님은 야훼 시다. 야훼 한 분뿐이시다. 네 마음을 다 기울이고 정성을 ?바치고 힘을 다 쏟아 너의 하느님을 사랑하여라. 오늘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이 말을 마음에 새겨라. 이것을 너희 자손들에게 거듭거듭 들려주어라. 집에서 쉴 때나 길을 갈 때나 자리에 들었을 때나 일어났을 때나 항상 말해 주어라. 네 손에 매어 표를 삼고 이마에 붙여 기호로 삼아라. 문설주와 대문에 써 붙여라.” (신명기 6:4-9)

 

신명기란 하느님의 명령 곧 이스라엘 백성이 지켜야 할 계약을 말합니다. 곧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기 위한 전제조건을 말하는 것이지요. 다시 말해 구원과 율법은 긴밀한 관계에 있다는 말씀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율법은 구원의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는) 조건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유대교의 계명에 대해서 그분께 듣습니다. 사실 유대교의 계명은 무려 613개 조항이었습니다.  그 중 248개는 명령이고 365개는 금령입니다. 이 많은 계명은 시나이 산의 모세에 의해 10계명으로 환원되고 다시 이 계명은 오늘 복음 말씀인 두 개의 계명, 즉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명으로 환원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선 하느님의 나라와 하느님의 뜻을 구하라고 명하시고 당신 스스로도 그렇게 사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인간을 위하시는 분이시기에 원수도 죄인도 사랑하라고 명하시며 당신 아들 예수도 스스로도 그렇게 가르치시며 사셨습니다. 누가 나의 이웃인지를 따지는 것보다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무조건 이웃이 되어주라고 하십니다. 그러면서 예수가 선포하신 황금률은 우리게 중요한 것을 얘기합니다. 너희는 남에게서 바라는 대로 남에게 해 주어라.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다.” 루카 6,31 먼저 이웃과 화해한 다음 제사를 바치라는 말씀이나 코르반 서원을 빙자하여 불효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말씀에서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불가분의 관계에 있음을 말씀하시는 것이지요. 

 

 

제가 94년도에 이스라엘에 성서 공부를 하러 갔을 때 많은 율사들의 복장과 수염을 보고 놀란 적이 있습니다. 그 더운 날씨에도 긴 수염을 기르고 있고 답답하리 만치 더운 복장을 갖춰 입은 그들을 보고 의아하게 생각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왜 그들에게는 그 율법이 그토록 중요한 것일까요?

 

이스라엘 역사 안에서 가장 커다란 슬픔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이 추방당해 바비론으로 끌려갔던 사건이었습니다. 그들이 추방당하고 이국에 살면서 그들은 열심히 그들의 율법을 지켜왔습니다. 추방당한 곳에는 그들의 왕도, 신을 모시는 신전도, 당연히 없었겠지요. 예언자들이 있긴 했어도 (에제키엘, 2째 이사야,) 이방인의 땅에서 그들의 신원 (이스라엘 백성이라는 것)을 나타낼 수 있는 방법은 율법을 철저히 준수하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율법이 그토록 중요한지를 말해주는 이유 중 하나이겠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지나치면 늘 문제가 되듯이 그들이 너무 지나치게 율법을 강조하게 되자 새로운 문제가 발생하게 됩니다. , 율법을 잘 지키기 위한 또 다른 법들을 만들기 시작하는 것이죠.

 

그들의 율법에 대한 이해를 다시 책이나 구전으로 옮겨 율법을 지키기 위한 법을 지키도록 강조하게 이릅니다. 이름하여 Mishnah, Gamara, Talmud등이 그것입니다. , 율법의 핵심을 잃어버리고 율법을 위한 또 다른 법들이 율법 자체보다 더 중요하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법 조문 자체로 만 해석한다면 불합리한 것들이 많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한 예로 우리 교회 안에서는 이혼한 사람이 재혼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한 번도 결혼하지 않은 사람은 자유롭게 결혼 할 수 있습니다. 내가 아는 어떤 미국 분은 한 번도 결혼하지 않았는데도 자녀가 3명이나 됩니다. 그래서 그분은 교회에서 결혼하는데 아무런 지장이 없었습니다. 즉 교회 안에서 결혼을 한 번도 하지 않았고 또 사회혼도 하지 않았으므로 그 분은 아무런 문제없이 교회 안에서 혼배성사를 통해 결혼을 할 수 있었던 것이지요.

 

물론 이런 분들에게 교회 안에서 결혼을 하지 못하게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바는 절대로 아닙니다. 단지 법조문 그 자체로만 본다면 불합리적인 문제가 발생 할 수 있음을 한 예로 들기 위한 것입니다.

 

사실상, 율법이 이야기하는 것은 사랑입니다. 위에서 봤듯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첫째가는 계명과 두 번째 중요한 계명은 사랑에 근거한 법이었습니다.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 . 이것이 율법의 가장 기본이고 율법의 정신이었습니다. 바로 그 두개의 율법을 완성하러 오신 분이 예수님이시라는 말씀이지요. 그래서 율법의 완성은 사랑의 완성입니다.

 

그럼 구약성서에서 말하는 율법을 보면서 그 율법이 사랑에 근거한 것인지 아닌지를 살펴보도록 합시다.

 

 

주인의 손을 벗어나 너희에게 피신해 온 종을 너희는 본주인에게 내주지 못한다. 어느 성 안에서든지 너희와 함께 살고 싶다고 하면 어디든지 그가 고르는 곳에서 살게 해 주어야 한다. 그리고 그를 괴롭혀도 안 된다.” (신명기 23:16-17)

 

주인을 도망쳐 나온 종을 보호하는 법입니다. 도망친 종이 원래의 주인에게도 돌려진다면 그 종은 불이익을 당할 것이 너무 자명한 일이지요. 율법은 이렇게 주인에게서 도망친 종까지 보호합니다.

 

신부를 맞이한 신랑은 싸움터에 나가지 않아도 되고 무슨 일에든지 징용 당하지 않는다. 한 해 동안 그런 일에서 면제되어 집에 있으면서 새로 맞은 아내를 행복하게 해 주어야 한다. 맷돌은커녕 그 윗짝도 저당 잡힐 수 없다. 그것은 남의 목숨을 저당 잡는 일이다.” (신명기 24:5-6)

 

결혼한 새 신랑이 한 해동안 징집에서 면제되어 아내를 행복하게 해 주어야 한다는 율법. 이 얼마나 인간적인 율법입니까? 그리고 아시다시피 이스라엘 사람들은 늘 밀을 갈아 빵을 구워먹습니다. 그런데 맷돌을 저당잡는 다는 것은 사람을 굶겨 죽일 수도 있기에 금하고 있습니다. 너무 인간적인 율법이라고 느껴지지 않으십니까?

 

너희는 엿새 동안 일하고, 이래 째 되는 날에는 쉬어라. 그래야 너희 소와 나귀도 쉴 수가 있고, 계집종의 자식과 몸 붙여 사는 사람들도 숨을 돌릴 것이 아니냐?” (출애 23:12)

 

안식일의 규정을 보면 우리가 쉬는 것도 중요하지만, 우리집에 몸 붙혀 사는 종들이나 종들의 자녀들도 쉬어야 한다는 자상한 배려, 심지어는 짐승까지도 쉬게 하시려는 하느님의 사랑을 볼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율법의 정신은 사랑입니다. 사랑에 근거하지 않은 법은 하느님의 율법이 아니기에 예수님께서는 그 율법의 정신대로 사셨지 문자화 된 법으로 살지 않으셨습니다. 이것이 왜 예수님께서 구전으로 전해 내려오는 율법을 가끔씩 무시하는 이유가 아니겠습니까? 이를테면, 안식일에 병자를 고쳐 주신다든가, 손을 안 씻고 식사를 하신다든가, 벼이삭을 손으로 비벼 먹는 제자들을 옹호하시는 이유말입니다.

 

너희는 하느님의 계명을 저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고집하고있다” (마르코7:8)

 

그렇습니다. 문자화된 법만을 고집하다 보면 법의 본정신을 잃어버리고 규칙을 지키는 것 자체가 중요하게 됩니다. 물론 우리가 지켜야 할 규칙은 중요한 것이지만 그 규칙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사람 자체일 것입니다. 다수 사람들을 위한 법으로 출발한 좋은 규정들이 사람을 잡는 도구가 되어버리는 경우를 우리 역사 안에서 쉽게 볼 수 있지 않습니까?

 

예수님 스스로 말씀하시기를 나는 율법을 폐기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 하러왔다고 말씀하십니다. 또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만약 너희들이 나를 사랑한다면 내 계명을 지키게 될 것이다.” 예수님의 계명은 무엇입니까? “나는 너희에게 새 계명을 주겠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서로 사랑하여라.” (요한 14:15, 13:34)

 

그렇습니다.

사랑하는 것. 그것은 율법의 완성입니다. 사랑을 실천하고 사람을 살리는 것이 율법의 정신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행복을 선언하시면서 내가 율법을 페기 하러 온 것이 아니고 완성하러 왔다고말씀하시는 것 아니겠습니까?

 

오늘 또 실수 하는 것인지 몰라도 예수님의 말씀을 내가 율법을 통해서 사랑을 완성하러 왔다고 말씀하시는 것으로 듣는 다면 가장 작은 계명들 가운데 하나라도 어기거나 그렇게 하도록 사람들을 가르치는 사람이 되어 하늘나라에서 가장 작은 사람의 대접을 받게 될까요? 아니면 행하게 가르치는 사람이어서 하늘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이라 일컬어질까요?

 

내 삶이 예수님 시대의 바리사이파인들의 생각에서 벗어나는 것이었으면 하는 희망이 간절한 하루였습니다.

 

. 지켜져야 하는 것이겠지만, 사람을 위한 법이고 사랑을 위한 법이어야 함을 오늘 복음을 통해 마음에 새겨두렵니다. 저는 오늘 복음을 이렇게 읽었습니다만, 여러분은 어떻게 읽으셨는지요?


               – Fr.  김 두진(바오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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