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의 공현 대축일에….
2019년의 기해년 황금돼지의 해가 밝았습니다. 우리 공동체의 모든 가정에 하느님의 축복이 가득하시길 빕니다. '행복하시개'하며 우스갯말을 건넨 것이 엊그제 같은데, 행복하면 돼지, 건강하면 돼지, 기쁘면 돼지하며 황금 돼지의 해를 맞이했습니다.
오늘은 주님의 공현 대축일입니다. 주의 공현 축일을 가리키는 이 말은 그리이스어로는 epifania 또는 teofania는 영어로는 Epiphany라고 합니다. 스스로를 드러냄, 유명한 존재가 됨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으면서 왕이나 황제의 도착(오심)과 관련되어 있는 단어입니다. 동방 교회에서는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나심'을 기리는 주의 성탄 축일을 epifania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공현축일을 통해 교회가 선포하려는 것은 그리스도는 빛으로 세상에 오셨다는 진실입니다. 오늘 제 1독서에서 바로 그 빛에 대한 찬미가 나타납니다. "예루살렘아, 일어나 비추어라, 너의 빛이 왔다. 주님의 영광이 네 위에 떠올랐다."이사야 60,1
빛이 얼마나 좋은 것이고 필요한 것인지 두말의 여지가 없습니다. 우리도 정말 좋은 환경 안에 살면서 그것이 얼마나 좋은지 모르는 경우가 너무 많은 것 같습니다. 미국에 살면서 미국이 얼마나 좋은지,…… 결혼해서 살면서 그것이 얼마나 좋은지,……. 수도생활을 하면서 그것이 얼마나 좋은지……. 가족이 함께 모여 살면서 그것이 얼마나 좋은지……. 이 기쁨을 살면서도 불평과 불만으로 가득 차 있으면 빛 안에 살면서도 그 빛의 고마움을 모르는 것과 다를 바 없지 싶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장차 종말이 닥치면 이방인들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조공을 바치러 예루살렘에 모여 오리는 기대가 있었습니다. (이사야 60:1-6, 시편 70:10-11) 이제 예수님께서 종말의 메시아로 베들레헴에 탄생하시니 동방에서 이방인 점성가들이 찾아와서 예물을 드립니다. 이방인의 세계를 대표했던 동방 박사들은 완전한 자격으로 교회에 들어오게 됩니다. 그런데 정작 받아들여야 할 유대인들은 불행히도 교회 밖에 머물러 있습니다. 예루살렘의 대사제들과 율법학자들은 베들레헴이 메시아의 탄생지라는 것은 가르쳐 줄 줄은 알았지만 그 메시아께 경배를 드리러 갈 수 없음을 복음은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너무나도 놀라운 역사적 이야기를 전해주고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그들이 누구이며, 몇 명이고 어떤 나라에서 왔는지가 아니라, 예수님 가까이 있는 이들은 예수님을 무시하고 헤로데처럼 해칠 계략을 짜는 반면 이방인들은 신앙의 빛의 자극을 받아 가난하고 비천한 모습의 예수님을찾아내고 알아봅니다.
그들은 캄캄한 밤하늘 속에서 한 별에 주목하고 그 별을 따라 왔습니다. 별은 갑자기 한 도시에서 사라져 버립니다. 왕궁의 화려한 불빛과 도시의 현란한 불빛 속에서 그 별 빛은 힘을 잃어버린 것이지요. 해서 동방박사들은 그 별 빛을 알아보러 화려한 궁으로 들어가지만, 거기에는 ‘별을 보지 못한 사람들로 가득 차 있을 뿐입니다. 또한 화려한 궁 안에 있던 사람들은 그분의 별을 보고 왔다는 동방박사들의 말에 “별”에는 관심이 없고, 오직 “유다인의 임금으로 태어나신 분”이라는 말에만 온 신경이 곤두서 있습니다.
박사들이 화려한 궁을 벗어나 다시 길을 떠났을 때, 동방에서 본 별이 다시 나타나 아기가 있는 집 위에 머무르는 것을 보고 그들은 대단히 기뻐하였다(9-10절)고 합니다. 그들이 기뻐한 이유는 그것이 대단한 수고를 치르고 얻은 기쁨이고, 오랜 싸움 끝에 얻은 기쁨이며, 때로는 실망과 좌절을 겪으면서도 쓰러지지 않고 얻은 기쁨이기 때문입니다. 박사들의 그 고단과 힘듬은 우리가 신앙안에서 갖는 여러 가지 체험들이 그리스도와의 만남을 쉽게 이루어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공현 축일에 집중적으로 나타나는 ‘빛’은 우리를 속이지 않는 빛이십니다. 그 빛이 세상에 전해질 수 있도록 그리스도는 빛나는 분이시다. 그러나 그분을 찾기 위해 동방박사들처럼 오랫동안의 고달픈 때로는 실망을 가져다 주기까지 하는 여정을 끝내 달릴 용기를 가진 사람들을 위해서만 밝게 빛나시는 분이시다. 새해에 여러분의 신앙이 또 여러분 가정의 축복이 하느님으로 부터 오는 것이 되게 하려면 이 빛을 우리 가운데 모셔 들여야 합니다. 그 빛이 우리의 어둠을 몰아내어 참 사랑의 삶을 살게 해야 합니다. 그 삶이 어려움을 동반하고 슬픔을 동반할지언정 우리는 빛의 힘으로 세상의 어두움과 맞서야 합니다.
어원적으로 공감(Sympathie)란 말은 ‘함께 고통을 겪다.’라는 뜻의 그리스어 (soun pathein)에서 유래 한다고 합니다. 마찬가지로 동정(Compassion)이란 말 또한 ‘함께 고통을 겪다.’라는 뜻의 라틴어 (cum patior)에서 나온 것이라 합니다. 사랑의 기반을 둔 이 단어가 우리게 말하는 것처럼 십자가의 삶은 고통을 참아내는 수동적 삶이 아니라 함께 겪어내는 능동적 삶을 말합니다. 그래서 사랑을 하는 사람들은 능동적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여러분 모두 황금돼지의 해에 빛이신 그분을 모셔 들여 능동적인 십자가의 삶을 지혜롭게 살아가시길 다시 한 번 기원합니다. 새해 하느님의 은총 많이 받으십시오.
– 김두진 바오로 신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