쉬운 듯 쉽지 않은 길
효(孝)란 무엇일까요? 그전에 윤리신학을 가르치셨던 최창무 주교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효는 부르심에 대한 응답이다.
(孝 = 召 + 答) 부모님 사랑에 의해 불림 받은 삶에서 충실히 답하며 살아가는 것이 효란 뜻입니다. 신앙도 하느님의 부르심에 대한 응답입니다. 즉 효도를 하는 것이나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모두 소명을 가지고 살아감을 뜻합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효도인지 몰라서 못하는 사람들은 하나도 없을 겁니다. 효도는 알면서 하지 못하는, 쉬
운 듯 쉽지 않은 길입니다. 돌이켜 보면 늘 저와 함께 살아계실 것 같던 부모님들도 제 곁을 떠나시고 나니 늘 귓전에 맴도는 소리는 "있을 때 잘하지"하는 핀잔 섞인 꾸중
을 듣는 것 같아 죄송스러움뿐입니다.
같은 의미로, 신앙생활도 쉬운 듯, 쉽지 않은 길입니다. 바로 소명의 삶이기 때문입니다. 소명에 따라 살다보면 칭찬을 받을 때도 있지만, 비난도 그에 못지않게 듣게 됩
니다. 그 소명의 길에서 외로움과 두려움이 엄습해 오고, 오해와 반대 때문에 고초를 겪기도 합니다. 그래서 소명의 길을 걸어가면서 ‘과연’이라는 단어와 ‘정말’이라는
단어를 수없이 반복하며 망설이기도 합니다. 과연 그럴까? 혹시나? 역시나? 늘 가슴에 바위 하나 담고 가듯 버거움을 안고 갑니다.
오늘 1독서를 통해서 예레미야의 ‘소명 사화’를 듣습니다. 자신이 있기도 전에 모든 것을 알고 계셨고, 자신이 태어나기도 전에 자신의 존재와 삶을 성별하신 하느님께서
예레미야를 불러 명하십니다. “너는 내가 보내면 누구에게나 가야하고 내가 명령하는 것이면 무엇이나 말해야 한다.”(예레1,7). 무엇이 옳고 무엇이 틀린지, 무엇이 하
느님의 뜻이고 무엇이 하느님을 거스르는 것인지 하느님께서 일러주신 그대로 말해야 하는 소명은 결코 쉬운 길이 아닙니다. 손이 늘 안으로 굽 듯, 자기 혀에 단것만 좋
아하고 자기 귀에 듣기 좋은 것만 들으려하며 모든 것을 자신의 뜻대로 하고자 하는 범인들에게 이 소명은 엄청난 인내를 필요로 하고 때로는 죽음을 자초하는 일이 될
수 있기에 쉬운 듯, 쉽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수많은 예언자들과 예수님은 어떻게 하느님께서 마련하신 소명의 길을 끝까지 걸어가실 수 있으셨을까요? 그저 내 팔자, 내 운명으로 받아들이셨을까요? 오
늘 2독서에서 소명 안에서 어려움을 이겨낸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사랑은 참고 기다립니다.” (1코린 13,4). 그렇습니다! 사랑 안에 소명을 살아낼 힘이 있
습니다. 우리가 평신도로 불림을 받았건 사제나 수도자로 불림을 받았건 소명의 삶을 살아야 하기에 어려움은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 안에서 또 가정 안에서 소명의 길
을 걸으려면 사랑으로 무장되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남편이 혹은 아내가 그리고 눈에 넣어도 안 아플 자녀들이 내 뜻대로 살지 않는다고 버릴 수 없는 노릇이고, 어찌할 수 없다면 인내를 가지고 사랑하는 수밖에
다른 방법은 없습니다. 설사 갈라서고, 다 던져버리고 내 맘대로 산다 해도 사람은 온전히 만족할 수 없을지 모릅니다. 세상은 더불어 살아가야 하기 때문이지요. 해서
더불어 산다는 것은 쉬운 듯 쉽지 않은 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고향에서 아무런 일도 하실 수 없었다고 말 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 있는데, 두 가지의 말씀으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그 첫 번째로, 주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살아내려는 소명으로서의 삶입니다. 누가 노래한 것처럼 "우리는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입니다. 사랑받고 있는 사람답게
사랑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한 것처럼 서로 사랑하려는 것은 우리가 미사 때마다 듣는 예수님의 명령입니다. "너희는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 하여라!"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심을 기억하며 그 사랑을 살아 내라는 것 아니겠습니까? 부모에게 사랑 받은 이들이 부모의 사랑을 기억하여 형제자매들끼리 서로 돕고 사는
것이 효도이며 그 효도는 사랑일 수 밖에 없듯이 말입니다.
두 번째로는 고향사람들은 예수님을 그저 목수의 아들로만 기억 했습니다. “저 사람은 요셉의 아들이 아닌가?” 나자렛 사람들은 어렸을 때 부터 보고자란 목수의 아들
예수라는 청년의 가르침을 하느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돼지 눈에는 돼지만 보이고 부처 눈에는 부처만 보인다"는 무학대사의 말처럼 속된 사람들의 눈
엔 구원자 예수님에게서도 그저 동네 이웃의 아들만 보일 뿐입니다. 고향 사람들의 이런 배타적인 행동을 보시고 “어떠한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
다.” (루카4,24)고 말씀하시며 예수님께서는 고향에서 발길을 돌리십니다.
스스로 이렇게 말하기가 좀 뭣합니다만, 성직자와 수도자는 스스로 되고 싶다고 해서 또 출중하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부르심이 있고, 또 그 부르심에 온
마음으로 응답했을 때 비로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즉 소명의 삶을 살기 위해 뽑힌 이들입니다. 사제는 개인의 능력이나 판단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과 은총으로 살아갑니다. 사람이면서 하느님의 사람으로서 살아야 하는 이들이 성직자와 수도자입니다. 흔히 우리시대를 권위 부재의 시대라고 이야기합니다. 오
랜 군사독재 정권 시절을 겪은 사람들은 그 후유증으로 권위 자체에 거부감을 가지지만 권위는 반드시 지켜져야 합니다. 가장의 권위가 없으면 그 가정은 흔들리고 선생
의 권위가 땅에 떨어지면 교육이 바로 설 수 없습니다. 권위는 반드시 지켜지고 존중 되어야 합니다. 성당에서도 마찬 가지입니다. 성직자와 수도자의 권위가 없는 성당
들은 신자들이 불행합니다. 참으로 좋은 공동체는 신자들이 성직자와 수도자를 하느님의 사람으로 알고 믿으며 깊은 뜻으로 마음에 담아 그들의 말을 실천하려고 노력
할 때 이루어집니다. 그 때 신자들은 행복하고 성직자와 수도자들 또한 그런 신자들의 기도와 믿음 속에 성화되어 더욱 신자들을 위해 헌신하며 살아갈 힘을 얻습니다.
이런 공동체를 우리는 복음적인 공동체라고 말하고 이런 공동체 안에서 인간의 힘으로 되지 않을 기적 같은 일들이 이루어집니다.
아직도 많은 이들이 저를 "수사님이셨을 때가 더 좋았다"고 말합니다. 좋은 뜻으로 알아듣습니다만, 이 말을 들을 때 마다 “저 사람은 요셉의 아들이 아닌가?”하던 예수
님의 고향사람들의 이야기가 떠오릅니다. 내가 아는 것이 전부인양 단정하고 한 이웃의 아들로 받아들이는 편견은 예수님을 벼랑으로 밀어내는 마음입니다. 기다릴 줄
아는 사랑, 성을 내지 않는 인내, 앙심을 품지 않는 선의, 우리가 지녀야 할 것들이라 사도 바오로는 말합니다. 이 또한 쉬운 듯 쉽지 않지만 우리 소명의 길인 것만큼은
확실합니다.
– Fr. 김 두진 바오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