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는 흘러갔다.
어느 주일학교 선생님이 돌아온 탕자의 이야기를 해 주며 하느님의 자비를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이야기를 마친 선생님이 어린이들에게 물었습니다.
"여러분, 집 떠난 아들이 돌아왔을 때 누가 제일 슬펐을까요?" 한 꼬마 녀석이 손을 번쩍 들더니 자신 있게 대답했습니다. "선생님, 누가 제일 슬펐냐 하면
은,……. 살찐 송아지요!" "왜?" 그 살찐 송아지는 그날 잔치 때문에 죽었으니까요.
돌아온 탕자의 비유를 읽다보면 예수 고난회의 창립자이신 십자가의 성 바오로의 말씀이 떠오릅니다. "하느님 사랑의 바다에 빠져라! 하느님의 사랑이 얼마
나 큰지를 알려면 빨갛게 달궈진 난로위에 떨어진 물 한 방울을 보라." 하느님의 자비는 빨갛게 달궈진 난로이고 우리의 죄는 물 한 방울과 같다는 설명입니
다. 사랑으로 빨갛게 달궈진 하느님께로 돌아갈 수 있음은 그래서 축복입니다.
돌아온 아들의 비유를 보면 그가 자신의 현실을 뼈저리게 직시하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순간에 자기가 돌아갈 곳이 있음을 알게 됩니다. 현실을 인정하
고 얼마나 배고픈지, 자기의 삶이 얼마나 고달픈지를 보면, 원망이나 후회는 뒷전으로 밀어 놓고 일단 살 궁리를 먼저 하게 됩니다. 절실히 살 궁리를 하는 사
람에겐 체면도, 가식도 없습니다. 맨 밑바닥에 떨어져 살 궁리를 하는 순간 그는 아버지를 기억해냅니다. "내 아버지의 그 많은 품팔이꾼들은 먹을 것이 남아
도는데, 나는 여기에서 굶어 죽는구나.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렇게 말씀드려야지.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저는 아버지의 아들이
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 저를 아버지의 품팔이꾼 가운데 하나로 삼아 주십시오.'"
고백성사를 들으면서 힘 빠지고 맥 빠지는 이야기도 많지만 그에 못지않게 아름다운 이야기도 많습니다. 많은 이들이 자신의 과거의 죄 때문에 하느님을 떠
나 살고 있습니다. 떠나 살면서 상처가 곪을 대로 곪아 돌아오고 싶어도 돌아오지 못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정말 영적으로 거의 죽음에 다다랐을 때
누군가의 초대를 핑계 삼아 피정을 가던지 교회로 돌아오는 사람들을 가끔씩 만납니다. "성사 본지 얼마가 되었는지 기억도 안 납니다." 10대에 가족에게 깊
은 상처를 받고 될대로 되라지 하는 마음으로 30년을 살아온 이에게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요? 그 오랫동안 슬퍼하며 자신에게 상처주고 산 사람들에게 내
가 할 훈계와 보속은 한마디도 떠오르지 않습니다. "정말 잘 오셨습니다. 감사합니다." 무슨 보속이 필요할까요? 그는 이미 30여년을 보속하며 살았습니다.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더 이상 할 말이 있을까요? 내 마음이 이렇다면, 하느님은 어떠셨을까요? 그 사람에게 길고 큰 보속을 원하셨을까요?
오늘 복음에서 큰아들은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을 뜻합니다. 그들은 아버지와 함께 있다 믿으며 아무 잘못 없다고 으스대고 반대로 죄 지은 이들의 과거
를 끊임없이 들춰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일들이 그들의 회당과 사회에서 당당하게 하느님의 이름으로 자행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잊은 것
이 있었습니다. 하느님은 모두를 사랑하시는 분이시며 죄인들에게나 의인들에게나 햇볕을 주시고 비를 내리시는 분이심을 잊었습니다. 그들이 잊어버린 것
은 그리스도의 황금률 입니다. “너희가 남에게 바라는 대로 남에게 해주어라.” 이것이 율법의 근본인데, 이것을 잊어버리고, 잃어버렸습니다. 해서 우스갯소
리로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이라 우기는 그들의 닫힌 마음이 스스로에게 얼마나 무서운 것이 되는지 조차 몰랐습니다.
큰 아들은 이미 아버지의 사랑 안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몸은 아버지와 함께 했다 해도, 마음은 동생보다 더 멀리 떠나 있었습니다. 아버지와 함께 있다는 의
미는 무엇이 주어질지를 바라는 욕심일 뿐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는 사람들이 자주 빠질 수 있는 유혹일지도 모릅니다. 내가 그렇게
하지 않았다고 해서, 혹은 다른 사람들이 범하는 죄를 짓지 않았다고 해서 행여 그들보다 낫다는 생각으로 산다면 잘못짚어도 한참을 잘못짚는 게 아니겠습
니까? 큰 아들은 아버지 곁에 몸만 있었고, 마음은 이미 멀리 떠나 입술로만 공경하는 허례에 살았습니다. 마치 마음은 떠나있으면서 눈 밖에 나지 않아 아버
지보다는 상속에 눈독 드리는 가련한 자식처럼 말입니다.
멀쩡하던 아들이 혹은 딸이 갑작스러운 사고로 부모를 떠나는 일이 있습니다. 참으로 조심스러운 말씀이지만, 그 부모의 고통이나 마음의 상처는 무엇으로
도 표현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만약, 만약에 죽었던 아들이 혹은 딸이 지금 환하게 웃으며 돌아온다면………. 자식을 잃은 부모님의 마음을 가장 아프게 하는
것은 더 이상 그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좀 더 잘해줄 텐데, 좀 더 기쁘게 해줄 텐데, 애가 해 달라는 것 빛을 내
서라도 해주는 건데…….. 인간의 부모가 그럴진대, 하느님께서는 어쩌시겠습니까? 오늘 복음에서 말하는 아버지는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을 잘 표현하고 있
습니다. 맨발로 달려 나와 안고, 키스하고, 옷 입히고, 살찐 송아지를 잡고, 잔치를 벌입니다. 아버지의 마음을 정말로 슬프게 한 것은 아들이 무엇을 했음이
아니라 사랑해 줄 아들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있었으면 더 잘해 줄 수 있었는데, 떠난 아들이 못내 안타까웠는데, 죽었다고 생각했던 아들이 거지의 몰골로
돌아옵니다. 찢기고, 찢긴 모습으로 돌아왔습니다. 하지만 큰 아들은 이해하지 못합니다. 나는 여태껏 아버지를 한 번도 배반 한 적이 없는데 왜 나는 염소 한
마리도 주지 않으실까? 큰아들의 마음도 조금은 이해되지만 아버지의 마음을 잘못 짚어도 한참을 잘못 짚었습니다. 아버지가 이렇게 속으로 외쳤을 겁니다.
"지금 잔치가 문제가 아니다. 아니 옷, 금가락지, 송아지 이것이 문제가 아니다. 문제는 죽었다고 생각했던 애가 돌아왔다는 것이다. 죽었다고 생각하고 슬퍼
하던 그 애가 돌아왔다는 말이다. 그런데 왜 너는 송아지, 잔치, 네 기분, 네 감정에 그리도 충실하단 말이냐? 무엇이 너를 그렇게 만들었느냐?" 큰아들은 아
버지의 마음을 또 한 번 찢습니다.
그렇습니다. 지나간 것은 과거 입니다. 살 궁리를 먼저 하는 사람에겐 체면도, 가식도 없습니다. 사실 아버지 앞에서 체면도, 가식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해서
하늘나라에서 가장 위대한 사람은 어린이와 같은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아이들은 부모님이 자기들에게 좋은 것만 주시는 분임을 의심 없이 믿습니다. 또 아
이들은 자기들이 저지른 잘못에 별로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그저 내가 부모에게 받는 것만 관심을 둡니다. 어른의 눈으로 보면 얄미울 정도로 뻔뻔합니다.
해서 그런 것을 보는 다른 어른들은 "하는 짓이 꼭 지 애비 (에미) 닮았다"하며 슬퍼하기도 하고 화를 내기도 합니다.
우리는 누구일까요? 돌아온 탕자입니까? 아버지 곁을 지킨 큰아들입니까? 누가 되었던 과거는 흘러갔음을 기억해야합니다. 과거에 아무리 매어 있어도
우리의 과거는 절대 변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해야 할 일이 무엇일까요? 이제 아버지와 함께 즐겨야 합니다. 살찐 송아지를 잡고 술을 마시고 춤추고
잔치를 즐겨야 합니다. 그럼에도 아직 과거에 붙들린 자들이 있다면 죄에 머물고 있는 사람들 아닐까요? 어떤 가수가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과거는 흘러갔다!"
– Fr. 김 두진(바오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