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하느님의 힘이신 성령께서 우리에게 내려오신 것을 기억하고 기념하는 성령강림 대축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뒤, 그분의 약속인 성령께서 사도들에게 내리신 것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지난 승천 주일에도 말씀을 드렸습니다만 승천은 예수님이 우리를 떠나신 일을 기념하는 날이 아니라 당신의 승천으로 인하여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는 그분의 현존을 기념하며 그분의 일을 우리의 손으로 행해야 하는 것을 다짐하는 것이라 말씀드렸습니다. 이제 그 일 예수님의 남은 고난을 채우려는 우리 모두에게 하느님의 숨결인 성령이 오시어 힘을 주시는 그분을 맞이합니다. 마치 다락방 문을 잠가 걸고 두려움에 떨던 제자들이 성령으로 인해 문을 박차고 뛰어 나가 그분의 복음을 선포하기 시작한 것처럼 하느님의 일을, 그분의 기쁨을 전하고 살아갈 것을 약속하는 날입니다. 성령강림은 예수님 안에 살아 계셨던 하느님의 숨결이 우리에게도 주어졌다는 사실을 기뻐하는 축일입니다. 성령은 민족과 언어의 장벽을 넘어 복음이 전해지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사람들은 서로가 다름을 확인하면서 서로간의 장벽을 만들어 냅니다. 다름은 다양함이며 풍요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의 좁은 시선과 편협한 마음이 다양함을 차별의 장벽으로 삼습니다. 남과 여, 피부의 색, 서로 다른 문화, 교육의 높고 낮음, 학연, 지연,…….. 이외에도 서로가 다름의 다양함을 차별화로 변질시켜 더 높은 곳에 머무르고 더 힘셈에 머무르려는 사람들의 욕심이 분열과 장벽 그리고 차별화의 구실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성령을 받으면 외국어를 자기 나라 말처럼 능숙하게 하게 된다는 뜻이 아닌 것처럼 사도들이 말씀을 전할 때 서로가 다른 언어로 알아들었다는 말씀은 사도들의 언어가 자동으로 번역되어 그들이 알아들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말이 전하는 뜻, 즉 마음을 열어 말을 알아듣는 다는 뜻입니다. 십년, 이십 년을 아니 더 오래 함께 살아도 서로의 마음을 알지 못하고 살아가는 부부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오래된 친구의 마음을 알아채지 못하고 살아가는 이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나를 포함해 소리는 듣되, 뜻은 듣지 못하는 이들이 얼마나 많을까요? 해서 오해하고 슬퍼하고 아파하는 우리들에게 성령은 하느님의 숨결로 우리게 다가오시어 마음을 열게 하시어 소리를 듣는 것이 아니라 소리 뒤에 숨겨진 뜻까지 듣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성령이 우리의 삶에 찾아와 어떤 역할을 하시는지, 또 그렇게 찾아온 성령이 우리 삶을 통해서 어떤 결과를 맺게 하시는지는 알아듣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하루가 다르도록 눈부신 발전을 거듭하는 과학이나 문명의 이기가 사람들을 또 다시 바벨탑을 쌓게 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의 능력 안에서 하느님의 능력을 보기란 쉽지 않기 때문에 더욱더 그렇습니다. 하느님의 능력은 하느님의 일에서 드러나고, 사람의 능력은 사람의 일에서나 드러낼 수밖에 없으니, 아무리 높은 바벨탑을 쌓아 올린 단들 사람의 능력으론 하느님의 일을 이해할 수는 없는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성령께서 우리게 오신다 함은 ‘우리가 우리들의 삶에서 필요한 것이라 간절히 원해서 얻어진 하느님의 선물’이 아니라, ‘우리의 삶에 반드시 필요한 것을 하느님께서 보내주신 선물'입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반드시 필요하다고 여기고 하느님께 청할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돈이나 건강을 청하는 것이 첫 번째일 것이고, 세상의 높은 권력이나 사업의 성공, 혹은 시험에서 좋은 결과를 얻기를 바라는 것들이 둘째나 셋째 혹은 그 다음순서가 아닐까요? 그러나 하느님의 선물인 은총은 개인의 이익을 위한 것이 아니라 세상 공동체를 위한 것입니다. 사람들이 하느님의 은총을 자신의 이익으로 청하는 것과는 달리 교회공동체가 말하는 하느님의 힘, 성령의 은총은 ‘슬기, 통달, 의견, 굳셈, 지식, 효경, 두려워함’의 일곱 가지 은총입니다. 이런 은총들을 통하여 세상에 드러내야 할 삶의 열매는 ‘사랑, 기쁨, 평화, 인내, 친절, 선행, 진실, 온유, 절제’라고 바오로사도는 말합니다. 성령의 은총은 개인을 위한 것이 아니라 공동체를 위한 것들이며 이 은총으로 맺는 열매들은 예수님께서 주시고 간 충만한 기쁨으로 살게 합니다.
우리는 어쩌면 하느님의 숨결인 성령도 장벽과 차별의 구실로 삼으려 합니다. 교회 공동체 안에는 다양한 봉사가 있어 풍요롭지만, 우리의 좁은 마음은 그 다양함을 성령과 결부시켜, 하느님에게 기원이 있는 차별이라 믿으려 합니다. 성령을 받은 자와 받지 못한 자를 구별하여, 성령을 인간 차별의 주범으로 삼는 신심 운동이 있다면 이런 행위나 신심은 성령도 장벽과 차별로 이용하는 구실일 뿐입니다. 사람들은 이렇게 장벽과 차별 만들기를 좋아함으로 분열과 장벽을 만들어 냅니다. 성령의 은총으로 봉사하는 이들이 늘어가는 공동체라는 것은 성장하는 공동체 말 그대로 일심동체의 공동체일 것입니다. 이런 공동체는 그저 꿈으로나 간직하는 공동체가 아니라 우리가 가꾸고 만들어야 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성령의 공동체 입니다.
성령은 하느님의 숨결입니다. 하느님 아버지 안에 우리를 하나 되게 하는 숨결입니다. 그 숨결은 예수님 안에 살아계셨고, 또한 예수님의 삶을 사려고 노력하는 우리 안에도 살아 계십니다. 우리를 하느님의 자녀 되어 살게 하는 성령이십니다. 오늘 복음은 그 자녀 됨이 예수님이 살아 계실 때, 보여주신 용서를 하느님의 일로 받아들이며, 그것을 우리가 실천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욕심, 허영, 질투, 미움 등은 우리가 지닌 한계, 곧 죄의 동기들입니다. 하느님의 숨결이 우리 안에 살아 계시면, 예수님으로부터 배워, 하느님 자녀의 삶을 살아가도록 재촉합니다. 성령의 오심은 마치 무서워 닫아 걸은 다락방을 뛰쳐나간 사도들처럼 차별화에 갇힌 편견에서 다양함의 풍요를 향해 뛰어나가 우리 삶 안에서 알렐루야를 노래하게 합니다.
오소서 성령님, 우리 안에 오소서, 마라나타 성령님!
– 김 두진(바오로)신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