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와는 달리 유목민이었던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목자는 친숙한 단어다. 목자는 양떼를 인도하며, 양들을 안전하게 보호하기 위해 그들과 함께
산다. 구약성서에는 하느님이 이스라엘의 목자이시다. 이사야
예언서는 하느님이 당신 백성을 이집트에서 데려 오신 사실을 이렇게 말한다. “목자처럼 당신의 양떼에게
풀을 뜯기시며, 새끼 양들을 두 팔로 안아 가슴에 품으시고, 젖먹이
딸린 어미 양을 곱게 몰고 오신다.”(40,11). 목자가 양들을 돌보듯이, 이스라엘을 돌보는 하느님이라는 말씀이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을 목자라 한다. 착한
목자는 지상에서 하느님의 일을 행하시는 분이시다. 목자가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어놓기 때문에 착한
목자다. 초기 신앙인들은 예수님이 선하신 하느님의 일을 실천하다가 죽임을 당하셨다고 고백한다. 그분이 하느님의 일을 실천한 것이 유대교 실세 들과의 충돌을 맞게 한다. 어느
안식일에 예수님이 손이 오그라든 병자를 회당에서 고친 이야기가 있다.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이렇게 묻는다. “안식일에 선한 일을 해야 합니까, 악한 일을 해야 합니까? 목숨을 구해야 합니까, 죽여야 합니까?” 회당에 모인 유대인들은 모두 침묵을 지켰다. 마르코복음서는 “예수께서 노기를 띠고 둘러보신 다음, 그 사람에게 ‘손을 펴시오’ 하셨다.”(3,5)고
전하며, “바리사이들은 밖으로 나가서 곧바로 헤로데 도당과 함께 모의하여 예수를 없애 버리기로 했다.” 고 전한다. 그분은 이렇게 사람을 살리는 선한 일을 행하다가 죽임을
당하신 착한 목자시다.
오늘 복음이 착한 목자와 대조하여 보여주는 것은 삯꾼이다. 삯꾼은 양들의 안전에는 관심이
없고, 자기 한 몸 살 궁리만 한다. 우리는 우리에 준해서
하느님을 상상한다. 하느님은 엄하게 판단하시고 당신의 영광을 찾는 분이라고 상상하고, 그런 상상의 결과로 교회를 위해 봉사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실제로는 하느님을 배경으로 자기의 권위와 영광을
찾는다. 오늘 복음은 그런 자세는 삯꾼의 것이라고 지적한다.
사람들에게 각자 자신은 매우 소중하다. 우리가
살아야 하고, 우리가 행세해야 하기에 그렇다. 우리가 잘
살기 위해, 남을 죽이는 전쟁과 각종 대량 학살까지 말하지 않더라도,
인류 역사는 약자에 대한 강자의 횡포와 학대로 꾸며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우리는
구실만 있으면, 자신을 과시하고, 이득을 추구하기 위해 다른
사람들, 특히 약자들을 이용한다. 입으로는 봉사를 외치지만, 기회만 있으면 봉사를 받으려 한다. 우리는 섬기는 분으로 우리 가운데
계셨던 예수님에 대해 말을 아끼고, 왕이신 예수님, 장차
심판하실 예수님을 즐겨 부각시킨다.
오늘 복음은 말한다. ‘아버지께서는 내가
내 목숨을 내놓기 때문에 나를 사랑하신다.’ 자기 한 사람 잘 되고 명예를 누리기 위해 사는 삶이 아니라, 자기 주변의 사람들을 아끼고 사랑하면서 그들을 위해 스스로를 내어주어 섬기는 생명을 하느님께서 사랑하신다는
말씀이다. 삯꾼은 자기를 중심으로 이해타산을 앞세우고 자기가 대우받을 길을 찾지만, 착한 목자이신 예수님을 배우는 사람은 자기를 필요로 하는 곳에 자기 스스로를 내어주어, 이웃을 살리고 섬기는 실천하는 사람들이다. 그것이 하느님의 자녀
되어 하느님의 생명을 사는 길이다. 그러나 “우리
안에 들지 않은 양들도 있다. 나는 그들도 데려와야 한다.”
양들을 섬기는 착한 목자의 모습을 기억하고 이웃을 사랑하고 섬기면 예수님이 다 하지 못한 우리 밖의 이들을 데려오는 착한 목자가 되지
않을까? 양들을 위해 목숨을 내어 주신 착한 목자를 보면서 우리는 어떤 내어줌으로 이웃에게 다가 가야
할까 생각하는 한 주간이 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