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전에 있었던 일입니다.
저는 알몸이 된채 어느 광장의 분수대앞에 앉아 있었습니다.
광장이니까 사람들이 많이 오가고 있었습니다.
이상스럽게도 사람들은 전혀 제 모습에 개의치 않고 지나고 있었습니다.
그래도 저는 무엇이라도 몸을 가릴 것을 찾으려고 두리번 거렸으나 전혀 몸을 움직일 수 없고 흐터진 신문조각 같은 걸 주워 가리려했지만 잘 되질 않고 일어나 도망가려해도 몸은 꿈쩍도 안하고 정말 식은땀이 온 몸을 흐르고 그야말로 미칠 지경이어서 막 몸부림치다가 소스라쳐 놀라 깨면 악몽이었습니다.
그런데 똑같은 꿈을 며칠만큼씩 자주 꾸게되었고 도대채 이 꿈이 저에게 무슨 의미가 있다는건지 곰곰이 따져보아도 알 도리는 없었지만 당시의 제 생활환경을 돌아다 보니 어느만큼 수긍가는 점이 있엇습니다.
개인 신상문제로 가정문제로 몹시 힘 겨운 삶에 시달리며 지쳐있었고 누구라도 저의 부끄러운 모습을 알게될까 두려운 마음으로 그렇게 오고싶은 우리 성당에도 못 오고 동네성당에나 갔다가 방황하며 저의 창피한 모습을 교우들로부터 감추려고 신문지 같은 것을 찾아 헤메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오래 살았더랬습니다.
그런 생활이 오래도록 계속되니까 같은 악몽도 계속 저를 괴롭히지 않았을까 그렇게 그냥 추정해 보았습니다.
* * *
그런데 요즈음 저는 좀 다른 일을 가지고 발가벗겨진채 광장으로 내 몰린 것 같은 창피스런 저를 발견하고는 몹시 괴로워하고 있습니다.
우연히 남들이 하는 얘기를 친교실에 앉았다가 귀동냥으로 듣고 너무나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이야기는 이렇습니다.
우리성당 교우중에 지체가 좀 부자유스런 분이 있었습니다.
요즈음 그분을 잘 만날 수가 없었습니다.
저는 그분이 저와 다른 미사시간에 참례하는가 보다 그저 그렇게 여겼습니다.
그런데 그분이 우리 교회를 아주 떠났다고 합니다.
그리고 개신교 신자가 되었다고 했습니다.
이유는 교우들의 편견 또는 계속되는 무관심에 그만 질려 가톨릭 신자로 남아 있을 수 있는 용기와 인내심을 밇었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분이 옮겨간 개신교에서는 그분을 보통 사람들과 너무나 차별없이 인격적으로 그리고 반겨주고 있다는 소식이었습니다.
이 보다 더 큰 충격이 있겠습니까?
이 보다 더 큰 망신이 있겠습니까?
이 보다 더 큰 창피가 있겠습니까?
그런 교우들에게 무관심하고 아는 사람들 하고만 반기고 떠들고 끼리끼리만 즐기는 바로 저 같은 창피한 사람이 그 교우를 교회밖으로 내 몰았다고 고백합니다.
사람들은 미사 시간에 눈에 뜨이게 자리가 많이 비어가고 있다고 걱정하는 말들을 합니다. 날이 갈 수록 교우 수가 이니고 빈 자리가 늘어만 갑니다.
해마다 우리는 선교하여 새 예비신자를 모아 힘들여 교육하고 세례를 주어 교우 수를 늘려갑니다. 그런데 전체 교우 수는 어째서 자꾸만 줄어만 갈까요?
모두가 한번 심각히 생각해보고 우리는 이 문제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지 돌아볼 필요는 없을까요?
밖에 나가 새신자를 모셔오는 일만 선교이겠습니까?
있던 이들마저 떠나도록 하고 있지는 않는가요?
우리가 농처럼 하는 말, “오는 사람 반기지 않고 가는 사람 붙잡지 않는다.”
이 말이 우스개 소리일까요, 아니면 견딜 수 없을만큼의 모욕적일까요?
무덤에 묻힌 라자로를 생각하며 예수께서는 눈물을 흘리셨습니다.(마태11.35)
아마도 저의 무관심속에 우리 곁을 떠나간 교우를 생각하시며 주님께서는 또 우실지 모릅니다. 그런 분들을 자꾸만 떠나게 하는 저같은 창피스런 자를 보고 주님은 무엇이라 하실까요.
” 창피한 줄을 알아라. 과연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너는 나를 사랑하듯이 네 이웃을 사랑하고 있느냐? “
창피한 저는 고개만 떨굴뿐 드릴 말씀을 못찾고 있습니다.
아마도 오늘밤 꿈에 또 다시 발가벗겨져서 광장으로 내 쫏길지 모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