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이 우리 안에 살게 하소서.

 

 

 

 

 

말씀이 우리 안에 살게 하소서.

 

 

성서는 어떻게 쓰여졌을까요? 성령께서 쓰라고 해서 받아쓰기의 수준으로 쓴 것이 아닙니다. 성서는 어떤 전승(예수님의 어록)을 가지고, 예수님과 함께 살았던 제자들이 예수님과의 체험을 기억하고 묵상하여 그분의 행적을 기록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다음 제자들의 중심으로 신앙 공동체가 생겨납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에 대해 회상하면서 그 회상한 바를 이야기로 남기게 되는데, 그것이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다가 상당한 시간이 경과된 후에 기록으로 남겨 오늘의 복음서들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제자들의 체험은 같은 것이었지만, 그들이 회상하고, 문자로 정착시켜 문서로 만드는 과정에 서로 차이를 갖게 됩니다. 그것이 네 개의 복음서들이 서로 다른 이유입니다.

 

우리가 주일 미사로 읽는 복음은 마르코 복음입니다. 지난주일에도 말씀드렸지만, 마르코복음서는 맨 처음에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이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하느님의 아들이라 말하게 된 경위와 그분의 가르침이 왜 기쁜 소식인지를 알리고자 쓴 글이라는 뜻입니다. 이 복음서에서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들이라 먼저 고백한 것은 마귀들이었다고 합니다. 예수님 안에 하느님의 생명이 살아 있다는 사실을 사람들은 알지 못했지만, 마귀들은 알았다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이 당신에 대해 ‘마귀들이 말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셨다.’고 하는 것은, 신앙 공동체의 고백은 귀신이 가르쳐 준 지식이 아니고 예수님의 십자가의 신비를 깨달았기 때문에 얻은 지혜라고 지난주에 말씀드렸습니다.

 

우리가 복음을 읽으면서 쉽게 오해할 수 있는 것이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들이니까, 초능력을 지니고 원하는 대로 기적을 행하셨을  것이라 상상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들이라 고백하는 것은 그분이 많은 기적을 일으키셨기 때문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하느님에 대해 올바로 가르치셨고, 그 하느님의 생명을  몸소 살아내셨기 때문입니다. 지금과는 달리 예수님의 시대는 '기적', '마귀' 라는 단어가 일상에 통용되던 시대였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그렇지 않습니다. 따라서 오늘 우리가 주위 깊게 들어야 하는 말은 기적이나 마귀가 아니라,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통해 하느님을 알아내는 것입니다.

 

유대교 지도자들은 인간이 겪는 모든 불행이 하느님이 주신 벌이라고 믿고 그렇게 사람들을 가르쳤습니다. 과연 사람들은 자기 죄 값 때문에 불행을 감수해야 합니까? 예수님은 이런 말도 안 되는 가르침을 거부하셨습니다. 하느님은 자비하신 아버지이시기 때문입니다. “어느 아비가 아들이 생선을 달라는데 뱀을 주겠습니까? 달걀을 달라는데 전갈을 주겠습니까?”(루카 11, 11-12). 우리 사람들도 자기 자녀들에게는 절대 나쁜 것을 주지 않습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 사람보다 못한 사랑을 베푸신다고 믿는 사람은 하나도 없어야 합니다.

 

“하느님은 악한 사람에게나 선한 사람에게나 당신의 해를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사람에게나 의롭지 못한 사람에게나 비를 내려 주십니다.”(마태오 5,45). 예수님이 우리게 알려주신 하느님이십니다. 그것이 예수님이 죄인과 세리들과 어울려 음식을 먹는다고 비난하는 율사들에게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마르 2,17)고 하신 이유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좋은 일도 많지만 나쁜 일도 많습니다. 병고, 가난, 힘있는 사람들의 횡포, 좌절, 실패, 사고 등등……. 예수님은 이런 불행이 하느님으로부터 온다고 가르치지 않으셨습니다. 사람들은 어려움을 겪으면서 살지만, 그 어려움을 극복하면서 성숙하게 되고 마음도 깊어갑니다. 돈이 많아서, 권력을 가져서, 혹은 걱정이 없기 때문에 사람이 행복해지고 성숙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자녀들을 잘 키우는 부모는 재물과 권력으로 행세하는 사람이 되라고 가르치지 않고, 자녀들과 함께 어려움들을 극복하면서, 이해하고 사랑하는 것을 가르칩니다. 이런 가르침을 통해 자녀들은 다른 이들과 더불어 사는 행복을 아는 성숙한 인간으로 자라게 됩니다. 재물과 권력을 과시하면서 살고 싶은 사람은 마치 조폭들이 무리지어 돌아다니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조폭들이 떼로 몰려다니는 것은 다른 조폭들에게 얻어터질까봐 그렇답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면서 고통을 피할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만, 그런 방도는 없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고통에서 면제시켜 주시면 좋겠지만, 하느님은 그런 분이 아니십니다. 신앙은 우리가 아쉬울 때, 불러들여 사용하는 요술 지팡이가 아닙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생명의 일을 실천하여 그분의 자녀로 살아 갈 때, 그 생 명의 기원이신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쉬운 말로 이 웃을 고치고, 살리며, 행복하게 하는 우리의 실천적 삶 안에 하느님은 함께 하십니다.

 

그리스도 신앙인은 예수님이 가르친 하느님을 믿고 배웁니다. 예수님에게서 하느님의 일을 배워 그것을 실천하여, 하느님의 자녀 됨을 증명합니다. 예수님이 병을 고치고 마귀를 쫓은 것은 병들고 마귀 들린 이들이 벌 받고 있는 사람들이 아니라는 것을 사 람들에게 알리고, 하느님은 그들에게 새로운 미래를 열어 주신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여러 가지 어려움에 시달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라면, 어려움을 겪는 이웃에게 무엇인가 해야 합니다. 그들을 위한 우리의 사랑 안에 하느님이 살아 계시기 때문입니다.

 

성서가 우리게 기쁜 소식이 되려면, 우리 안에 말씀이 살아있게 하려면, 예수님께서 하신 일들을 배워 우리 생활 안에서 실천해야 합니다. 말씀이 사람되시어 우리 가운데 오셨습니다.

 

말씀이신 주님 저희 안에 살아계시어 저희가 복음을 살아내게 하소서.

 

                                                                                                                                                                                           – 김 두진(바오로)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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