즐거워하여라.

 

 

 

 

 

즐거워하여라.

 

 

사순 제4주일을 ‘래따레 주일’(Laetare)이라고 부릅니다. 오늘 주일 입당송이 “즐거워하여라, 예루살렘아”(Laetare Jerusalem)라는 말로 시작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입니다. 제가 어릴 때만해도 사순시기는 '재의 시기'라 하여, 매우 엄격한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사순시기는 40일의 준비기간이라 말씀드렸습니다. 대림시기도 사순시기와 같이 대림 3주일은 핑크주일로 불리는 주일이 있습니다. 엄격한 생활 중에서 쉬는 기간(?)이라기보다는 사순시기와 대림시기가 무엇을 준비하는지를 일깨워 주는 주일이 아닐까 싶습니다.

 

요한 복음사가는 우리에게 기쁨이 어디에 있는지를 알려줍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요한 3,16-17).

 

오늘 복음의 말씀은 니코데모와의 대화에서 나온 이야기입니다. 니코데모는 바리사이파에 속하는 유대 최고회의 의원으로 유대인들

사이에서는 저명 인사였습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어 올린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들어 올려져야 한다.’ 요한복음서는 십자가를 모세의 구리 뱀에 비유했습니다. 구리 뱀의 이야기는 민수기(21,4-9)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옛날 이집트를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를 헤매고 있을 때, 불뱀이 나타나 사람들을 물었고, 물린 사람들은 죽었습니다. 모세가 구리로 뱀을 만들어 높이 달아 놓으니, 그

구리 뱀을 쳐다본 사람은 모두 치유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복음서는 민수기의 이야기를 전하면서 예수님의 십자가는 옛날 광야의 구리뱀과 같이 우리에게 주어진 구원의 징표라고 합니다. 그것이 구원을 의미하는 이유는 하느님이 세상을 사랑하셔서 당신의 아들, 예수를 세상에 보내셨고, 그 예수님은 하느님의 사랑을 실천한 결과,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셨다는 것입니다. 사랑과 헌신의 결과가 십자가의 죽음이었고, 십자가는 세상을 위한 하느님의 사랑이 얼마나 지극한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은 심판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러나 사람이 하느님의 빛을 외면하고, 악한 일을 저지르며 어둠 안에 머물면, 스스로를 심판

하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하느님은 심판자가 아니시고 오히려 구원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분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 빛이 어둠 속에 비치고 있건만 어둠은 빛을 받아들이지 않았다.”(1,4-5)는 요한복음의 서두의 말씀이 오늘 복음에도 다시 반복됩니다. 그리고 어둠에 있는 이들이 내리는 스스로의 심판에 대해서는 "그 심판은 이러하다. 빛이 이 세상에 왔지만, 사람들은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하였다. 그들이 하는 일이 악하였기 때문이다. 악을 저지르는 자는 누구나 빛을 미워하고 빛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자기가 한 일이 드러나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3,19-20)

 

즉, 어둠속에 자기를 가두어 두는 것이 스스로의 선택이라고 합니다. 구원은 우리의 자유와 무관하게 주어지는 ‘대박사건’이 아닙니다. 구원은 무조건 믿어서 얻어내는 보상도 아니고, 우리가 드리는 신심행위에 대한 포상도 아닙니다. 같은 의미에서 신앙은 정화수를 떠놓고 행복을 빌어대는 빎도 아닙니다. 신앙은 하느님의 빛으로 더 넓은 세상을 보고, 자유를 누리며 사는 길입니다. “너희가 내 말에 머물러 있으면…….진리를 알게 되고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요한 8,31-32). 즉, 예수님께 배워 스스로에게 머물지 않고 하느님의 빛을 받아들이고, 그 빛이 보여주는 진리를 실천하는 사람이 자유로운 사람이 된다고 하십니다.

 

신앙은 하느님께서 세상을 너무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신 것처럼, 우리들도 세상을 사랑하기에 세상이 사랑으로 구원되기를 바랍니다. 바로 사랑이 그리스도 신앙인의 정체성이기 때문입니다. “너희들이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그것을 보고 너희가 내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요한 13,35). 그러므로 사랑은 우리가 누려야 할 하느님 자녀로서의 당당한 권리입니다.

 

오늘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작품입니다. 우리는 선행을 하도록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창조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선행을 하며 살아가도록 그 선행을 미리 준비하셨습니다.” (에페소 2,10) 이 말씀을 바탕으로 본다면 사람을 행복하게 하는 건 먹고 마시는 즐거움도, 돈과 명예 혹은 권력처럼 외부로부터 채워지는 기쁨이 아닙니다. 바로 하느님을 닮은 걸작품답게 그분의 사랑하시는 아드님을 세상에 보내 주셨듯이, 우리들의 사랑을 온 마음으로 이웃에게 쏟아낼 때 참된 인생의 기쁨과 행복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행복은  밖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서부터 채워지는 것이기에 사라지지 않은 행복이 되지 않겠습니까?

 

하느님의 걸작품이 되는 것은 우리의 본연의 모습인 하느님을 닮아서 하느님처럼 되는 것 아닐까요? 하느님의 눈으로 세상을 보고 하느님의 마음으로 세상을 보면 구원이 우리 곁에 있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우리들의 나약함과 우리들의 게으름으로 세상을 사랑하기가 쉽지는 않지만, 하느님을 닮은 우리가 해야 할 일을 멈출 수는 없습니다.

 

지금 사순시기를 지내면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받아들여 그 사랑을 살아내고 하느님의 사랑을 받은 우리답게 이웃을 사랑하고, 이웃에게 선행을 베풀어야 합니다. 하느님의 걸작품인 우리에게 요한의 첫 번째 편지는 말합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을 알지 못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4,8)

 

                                                                                                                                                                                          – 김 두진(바오로)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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