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짜르트와 작은 아들
"아마데우스"는 1984년에 제작되었고 그해 8개의 아카데미상을 휩쓴 영화입니다. 이 영화의 주인공은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짜르트 (Wolfgang Amadeus Mozart)와 안토니오 살리에리 (Antonio Salie ri)입니다. 영화의 내용을 더듬어보면 살리에리는 오스트리아 빈에서 요제프 2세 황제의 궁정 음악 장이었습니다. 어느 날 황제 요제프 2 세가 모차르트에게 오페라 작곡을 의뢰하기 위해 그를 궁중으로 초대 합니다. 이 때 살리에리는 모차르트를 환영하는 행진곡을 작곡해 궁중에서 연주하는데 모차르트는 살리에리의 연주를 한 번 듣고서 악보도 보지 않은 채 재현해내고 수정할 부분까지 지적합니다. 이런 모차 르트의 천재적인 재능을 실감한 살리에리는 패배감에 사로잡힙니다. 그러던 와중에 모차르트가 살리에리의 약혼녀까지 자신의 오페라에 출연하게 하여 그녀를 범하고, 오만하고 방탕한 생활을 거듭하자, 모차르트에게 천재성을 부여한 신을 저주하며 모차르트를 증오하게 됩니다. “그때부터 나는 신을 믿지 않게 되었소. 오만하고 음탕하고 지저분하고 유치하기 짝이 없는 녀석을 선택하고 나에겐 그것을 인정 할 수 있는 능력밖에 안 줬기 때문이오.” 영화 안에서, 수십 년이 흐른 뒤에 살리에리가 사제에게 고백한 내용입니다. 살리에리는 신이 편파적이고 매정하다고 여기며, 모차르트에 대한 증오심을 더욱 키워갑니다. 그럴 즈음, 빈곤과 병마로 시달리던 모차르트는, 자신이 존경하던 아버지의 죽음에 충격을 받고 자책감에 시달립니다. 이런 사실을 알게 된 살리에리는 모차르트에게 아버지의 환상에 시달리도록 조장하면서, ‘진혼곡’의 작곡을 부탁하고, 모차르트는 그 유명한 레퀴엠 (Requiem)을 작곡하게 됩니다. 작곡을 하면서 계속돼가는 심리적 압박감에 모차르트는 결국 지쳐 쓰러져 죽게 되고, 살리에리도 자기가 천재 음악가 모차르트를 죽였다는 죄책감에 사로잡혀 자살까지 시도하는 죄인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은 예수님께서 세리들과 죄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모여오는 것을 보고는 “저 사람은 죄 인들을 받아들이고 또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군.” 하며 투덜거립니다. 마치 탕자의 비유에서 아버지가 방탕한 생활을 하다가 돌아온 동 생을 위해서는 큰 잔치를 벌여주지만 자신을 위해서는 염소 한 마리 내어주지 않는다고 아버지에게 불평을 하던 큰 아들의 모습과 같습니다. 돌아온 탕자라고 읽혀온 되찾은 아들의 비유는 루가복음에서만 나오는 특수한 자료입니다. 이 비유를 말씀하신 계기는 예수님께서 자주 세관원들과 죄인들과 어울려 식사하시는 것을 보고 바리사이들과 율사들은 심히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것에 대한 답변으로, 비유의 뜻은 하느님은 회개하는 죄인을 반기신다는 것이요, 바리사이와 율사들은 하느님의 이 기쁨에 마땅히 동참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탕자라 일컫는 작은 아들은 세상의 모든 기쁨과 쾌락을 누렸지만, 종내에는 불결한 짐승이나 먹던 사료를 먹으며 아버지를 기억합니다. 즉 하느님을 떠난 인간의 비참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 아들은 아버지께 돌아갈 것(회개)를 결심합니다.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저는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 저를 아버지의 품팔이꾼 가운데 하나 로 삼아주십시오. '
이에 대한 복음의 답변은 이렇습니다. “그가 아직도 멀리 떨어져 있을 때 아버지가 그를 보고 가엾은 마음이 들어 달려가 아들의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추었다.” 우리가 하느님께 돌아가는 데는 아무런 조건이 없습니다. 아버지를 슬프게 한 것은 사랑하고 싶어도 사랑 할 아들이 당신 곁에 없다는 데에 있었습니다. 이제 그 아들이 돌아옵니다. 아버지의 눈에는 그 아들이 무엇을 했는지 어떻게 살았는지가 보이는 것이 아니라 지쳐 돌아오는 아들만 보입니다. 아버지의 사랑이 돌아오는 아들이 저지른 것보다 훨씬 크기 때문입니다.
“보십시오. 저는 여러 해 동안 종처럼 아버지를 섬기며 아버지의 명을 한 번도 어기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저에게 아버지는 친구들과 즐기라고 염소 한 마리 주신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창녀들과 어울려 아버지의 가신을 들어먹은 저 아들이 오니까 살진 송아지를 잡아 주시는군요.” 큰아들의 투정입니다. 마치 바리사이의 기도와 같습니다. "바리사이는 꼿꼿이 서서 혼잣말로 이렇게 기도하였다. ‘오, 하느님! 제가 다른 사람들, 강도짓을 하는 자나 불의를 저지르는 자나 간음을 하는 자와 같지 않고 저 세리와도 같지 않으니,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저는 일주일에 두 번 단식하고 모든 소득의 십일조를 바칩니다.’" (18,11-12)
큰아들은 자기의 아우를 가리켜 “저 아들”이라고 부릅니다. 이는 돌아온 탕자가 아버지의 아들은 될지언정 내 아우는 될 수 없다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너의 저 아우”라고 함으로 그 둘이 분명 형제임을 밝힙니다. 내가 율법을 지키느라 얼마나 고생하며 힘들게 사는데 아무렇게나 사는 저 세리나 창녀들은 어찌 아버지의 사랑을 받고 살 수 있단 말입니까?라는 투정에 그들이 너희의 형제요 자매라고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이제 아버지는 기쁨의 잔치를 베푸십니다. 이 잔치에 화가 나서 들어가지 않는 큰아들이 옳은 것은 아니고, 베풀어진 잔치에 죄송해서 들어가지 못하는 작은 아들도 옳은 것도 아닐 겁니다. 우리 모두는 잔치에 초대받아진 사람들입니다.
역사적 사실은 아닙니다만, 영화에서 살리에리는 모차르트가 나타나기 전까지 그 나라의 첫째가는 음악가였습니다. 자기가 가진 재능을 가지고 노력하는 음악가였다면 더 좋은 작품을 많이 남길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질투심이 모차르트도, 자신도 죽게 만들었습니다.
오늘 복음 말씀은 우리 모두가 잔치에 초대 받은 사람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이 초대받은 잔치에 들어와 보니 거기엔 의외로 우는 사람도 있고 소외된 사람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왜 소외된 이웃들과 가깝게 지내셨는지 이해되며, 회개하는 죄인 하나가 하느님의 천사까지 기뻐하게 할까 이해가 됩니다. 회개란 하느님께 돌아가게 하는 잔치로의 초대이고, 기쁨을 살게 하는 신비로움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작은 내 안에 잠기면 잔치의 기쁨은 보지 못하고 답답한 억울함을 간직한 채, 슬픔을 살아갈 뿐입니다. 큰 아들이던 작은 아들이던 우리 모두는 하느님께서 베푸시는 잔치에 초대 받았습니다.
김 두진(바오로)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