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브라함의 믿음과 기도

 

 

 

 

 

아브라함의 믿음과 기도

 

 

 

우리가 고백하는 대로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입니다. 그는 나이 일흔이 훌쩍 넘어 하느님의 명으로 어디로 가야 하시는지도 모르는 채 정처 없이 떠난 분입니다. 우리가 읽은 제 1 독서는 지난주에 이어진 이야기 입니다. 지난주의 독서를 잠시 되돌아보면, 아브라함이 더운 한낮에 천막 앞에 앉아 있는데 손님 세 사람이 나타납니다. 아브라함이 손님들을 잘 접대해 주자 하느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년 이 때에… 너의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을 것이다”(창세 18,10). 아들을 달라고 청하지 않았는데도 사라에게서 태어날 아들을 약속하십니다. 그러나 사라가 볼 때에 그 말씀은 무척 웃기는 얘기였습니다. "이렇게 늙어버린 나에게 무슨 욕정이 일어나랴? 내 주인도 이미 늙은 몸인데……. (창세기 18, 12) 그러나 하느님은 아브라함과 사라가 생각한 것과는 다른 방식으로 미래를 열어 가셨습니다.

 

오늘 제 1 독서의 말씀에서 아브라함의 집에 들렀던 세 손님은 소돔 과 고모라로 가서 그들이 저지르는 악행을 확인하고 그 두 도시를 멸망시키겠다고 아브라함에게 알려줍니다. “그 성읍 안에 의인이 쉰 명 있다면?”(18,24) 아브라함은 소돔과 고모라에 살고 있을 의인들을 악인들과 함께 멸망시키신다면 “그런 일은 당신께 어울리지 않는" 일이라 말합니다.(18,25)아브라함이 알고 있는 하느님은 의로우신 분이시니, 의롭게 행하셔야 한다는 다소 건방진 청이었습니다. 비록 아브라함의 건방진 요구였지만, 하느님은 그의 청을 들어주십니다. 옳다구나 이제 아브라함의 그 유명한 바겐(Bargain)이 시작 됩니다. “의인 쉰 명에서 다섯이 모자란다면?” “혹시 그곳에서 마흔 명을 찾을 수 있다면?” “혹시 그곳에서 서른 명을 찾을 수 있다면?” “혹시 그곳에서 스무 명을 찾을 수 있다면?” “혹시 그곳에서 열 명을 찾을 수 있다면?” 아브라함은 여섯 번에 걸쳐 하느님과 흥정하지만 소돔과 고모라에는 의인이 열 명도 없었습니다. 결국 아브라함이 그렇게 간절히 하느님께 노여워 마시라 애원하며 청했던 것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예언자는 하느님과 백성 사이에서 말씀을 전달하는 역할 뿐이라는 것입니다. 마치 아브라함이 실패한 예언자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구약의 많은 예언자들 예레미야, 에제키엘, 이사야… 이렇게 여러 예언자들이 하느님의 말씀을 전했지만 백성들이 그 예언자들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사람들이 예언자의 말을 듣고 회개하지 않았다고 해서 예언자들이 사명을 다 하지 못한 것은 아니라는 겁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까지가 그들의 사명이었습니다. 회개하여 돌아오게 하는 것까지 그들의 임무가 아니었습니다. 보고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는 백성들을 어찌 하실 수는 없으셨던 예수님처럼 말입니다.

 

미국의 많은 도시에서 증오와 분노로 많은 이들이 목숨을 잃거나 다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이 있을까요? 예언자는 하느님과 백성 사이에 있는 사람으로서 백성을 위해 하느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아브라함이 했던 것처럼, 겸손한 마음으로 간절히 청해야 합니다.

 

“저는 비록 먼지와 재에 지나지 않는 몸이지만, 주님께 감히 아룁니다.”(18,27).

빈부의 격차로, 힘의 논리로, 증오와 분노로 다치거나 죽어가는 이 현실 안에서 감히 우리 모두 용서와 화해 그리고 회개를 하느님께 빌어야 합니다. 요즈음 뉴스를 보면서 멸망한 도시를 말없이 “자기가 주님 앞에서 있던 곳”에서 소돔과 고모라로부터 솟아오르는 연기를 바라보고 있는 아브라함의 모습이 그려집니다 (창세기 19, 27) 6살 난 어린아이가 총에 맞아 죽고, 경관을 쏘아 죽이며 통쾌해 하는 이들의 모습에서 폭력에 일그러지고 연기가 피어나오는 상처투성의 현실이 보입니다. 그 자리에서 아브라함이 주님께 간청 드렸던 일을 기억했듯, 우리들도 이 현실 안에서 기도를 통해 상처난 이들의 마음을 보고 있습니다. 희망도 함께 보입니까?

 

아브라함의 위대한 믿음은 여기서 끝이 아닙니다. 바라지도 않았던 아들을 약속하신 하느님으로부터 늦둥이로 이사악을 얻었는데 이제는 그를 번제물로 바쳐야 합니다. 이사악은 아버지에게 묻습니다. “번제물로 바칠 양은 어디 있습니까?” “번제물로 바칠 양은 하느님께서 손수 마련하실 거란다”(22,7-8 참조). 그래서 아브라함은 그 곳을 “ 주님의 산에서 마련된다.'는 뜻으로 '야훼 이레'라고 이름 짓습니다. (22,14). 아브라함은 하느님께서 이사악을 통하여 후손을 주시겠다고 약속 하셨기에 그 말씀을 믿었었습니다. 그런데 이사악을 번제로 바치라 하시던 하느님께, '어떻게 그 약속을 이루실 것인가?'하는 의문은 안 생겨났을까요? 눈에 넣어도 안 아플 아들을 번제물로 바치려는 아브라함에게 갈등은 없었을까요? 말없이 침묵하는 아브라함의 모습에서 수 만 가지의 질문들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에서 배워야 할 것은 침묵만이 아닙니다. 아들을 약속하시고, 아들을 주셨다가 다시 번제물로 바칠 것을 요구 하시는 하느님. 아브라함은 하느님의 마음과 생각을 잘 알아서 그분이 하시고자 하는 대로 했던 것도 아니고, 하느님께서 그의 기도를 꼭 들어 주시리라 믿었기에 생각없이 하고자 했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저 하느님은 당신의 계획이 있으며, 비록 희망이 없어 보여도 당신의 뜻을 꼭 이루어내신다는 것을 믿었습니다. 대답없는 질문들을 던지면서 아브라함은 하느님 앞에서 소돔과 고모라를 위해 기도했습니다. 그것만이 아브라함이 할 수 있는 몫이었기 때문입니다. 처참한 폭력 앞에 울고 있는 우리의 이웃을 보면서, "아버지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나이까?"하시던 예수님의 절규를 현실 안에서 보고 들을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기도를 멈추지 않는 것은 우리의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꼭 이루어질 것임을 믿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기도해도 우리 눈앞에서는 놀라운 일도 일어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아무리 하느님께 간청해도 어떤 사람은 회개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아무리 기도해도 우리가 살고 있는 이곳에 대단한 변화도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아브라함은 우리에게 놀라지 말라고 말합니다. 하느님의 뜻은 반드시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김 두진(바오로)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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