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모든 성인 대축일이다. 그리스도 신앙인들은
순교자들이 죽은 날을 탄생일이라 불렀다. 죽음으로 참다운 생명에 태어났다는 믿음의 표현이다. 지금은 죽은 이들을 화장하는 것이 허락 되었지만, 신앙인들이 화장을
하지 않고, 땅에다 묻는 것도 예수님이 돌아가셔서 땅에 묻히셨듯이, 그리스도
신앙인도 땅에 묻혀서 대지에 심어진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성인은 시성 절차를 거친 이들을 말한다. 그러나
교회 초기부터 오랫동안 시성절차 없이 각 지역신앙인들이 성인을 정해서 공경했다.
로마교황청이 허락한
자들만 성인으로 공경하라는 지시는 1171년, 그러니까 12세기에 처음으로 내려졌다. 오늘의 시성식 절차는 1917년 교회법전의 반포 후에 생겼다. 역사적으로는 4세기 말 안티오키아교회의 달력에 모든 성인의 축일이 11월 1일로 기재된 것을 보면, 모든 성인의 축일은 교회가 오래 전부터
기념하였던 것이다.
오늘 미사에서 우리는 복음으로 마태오복음서가 전하는 행복선언을 듣는다. 마태오복음서는 이 선언으로 시작되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모세의 십계명과 같은 수준에 놓기 위하여, 모세가 십계명을 산에서 받았듯이, 예수님도 산에서 가르치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하였다. 루가복음서는 이 부분을 예수님이 평지에서 말씀하신 것으로 전한다. 마태오복음서는 모세의 십계명을 대신하는 예수님의 가르침이라는 사실을 나타내려 하였다. 우리에게는 당연한 것으로 생각되는 원칙들, 즉 통념들이 있다. 재물은 정직하게만 모으면 다다익선, 곧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것이다. 지위는 높을수록 좋다. 높은 사람은 당연히 대우를 받아야 한다. 다른 사람이 나를 위해준 만큼 나도 그 사람을 위해주고, 나를 미워하는
사람은 나도 당연히 미워한다. 죄는 벌을 받아야 하고. 성공은
칭찬을 받으며, 실패는 부끄러운 일이다. 승리는 자랑스럽고, 패배는 부끄럽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통념들이 가지고 있는 함정이 있으니 그것은 다른 사람들과 나를 분리해 놓고
내가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 지를 말하기 때문이다. 흔히 종교들도 그런 우리의 통념들을 성취시켜주는 하느님인양
말하기고 하였다. 그리스도 신앙의 역사 안에도 그런 우리의 통념이 만든 언어들이 있다. 교회 안의 많은 신분들이 하느님으로 말미암은 입신양명인 양 인식되기도 하고,
하느님이 주신 재물이라고 포장되기도 한다. 하느님은 착한 사람 상 주고, 악한 사람 벌주는 상선벌악의 교리도 그런 우리의 통념에서 나온 함정이다. 그리스도신앙은
우리가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는 그런 통념들을 넘어서 우리와 전혀 다른, 하느님을 기준으로 살자는 생활의 운동이다. 오늘 행복선언이 나열하는 사람들은 우리의
통념에서는 모두 행복할 수 없는 사람들이다. ‘가난한 사람’, ‘슬퍼하는
사람’ ‘굶주린 사람’, ‘자비를 베푸는 사람’, ‘예수 때문에 박해 당하고 사악한 일을 당하는 사람’, 이 모든
이는 우리가 행복하다고 말하지 않는 이들인데, 그런 사람들을 행복하다고 말하는 복음은 하느님을 선포하는
복음이기에 그렇다. 그들이 행복한 것은 우리의 통념을 넘어서 하느님을 보고, 하느님을 기대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행복선언을 하느님과 연결하지
않고 행복을 찾으려 한다면, 아주 크게 잘못 해석하는 것이 된다. 하느님은
인간이 지닌 질서 안에 살아 계시지 않으신다. 하느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신앙인은 하느님의 질서를 살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이다. 그리스도 신앙은 인류역사 안에 베풂과 사랑과 용서를 실천하고 살았다. 그것이 하느님의 질서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오늘 그 사실을 기억하고
받아들이는 모든 성인축일을 지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