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복음은 어느 안식일에 카파르나움의 회당에서 일어난 일을 이야기하고 있다. 예수님이 회당에서 가르쳤고, 사람들은 그분의 가르침에 놀랐다고 한다. 마침 그 회당에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이 있었는데, 그가 소리를
질렀다.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재미있는 것은 더러운 영이 예수님의 신원에
대해 먼저 고백한 것이다. 복음서는 사람이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들, 메시아
혹은 거룩하신 분 등, 신앙고백의 성격을 지닌 말을 할 때마다, 예수님이
함구령을 내리신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러다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숨을 거두시자 비로소 이 복음서는
백인대장으로 하여금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드님”이라고 고백하게
하여 당신이 누구인지를 밝히신다.
십자가의 죽음을 모르면서, 예수님에 대해
올바른 신앙고백을 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 우리 신앙생활에서
십자가를 알지 못하면 예수님을 제대로 고백할 수 없다. 십자가를 모르면서 고백하는 것은 바로 마귀의
고백 즉 입으로만 하는 고백이다. 예수님에 대한 올바른 인식은 십자가의 고통과 죽음을 잊지 않을 때, 비로소 가능하다는 것이다. 즉 십자가를 포함하여 예수님을 알아야
하고, 십자가의 고통과 죽음을 통해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들이라 고백할 수 있다는 것이다. 십자가는 예수님의 생애를 요약하는 상징이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사람들을
보살피고 돌보는 일에 당신 스스로를 내어주고 쏟으신 결말이었다. 마르코 복음서는 그 사실을 모르면, 예수님에 대해 말하지 말라고 전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하는 것은 십자가에 이른 그분의 삶이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바가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은 예수님 혹은 하느님을 믿어서 개개인이 더 잘 살 수 있다고 말하지 않는다. 또 이 신앙은 더 많은 재물과 더 존경스러운 지위를 얻도록 해 주지도 않는다.
만약에 이런 염원이 우리 신앙 안에 자리하고 있다면, 그 염원은 인간을 자유롭지 못하게
하는 더러운 영에서 오는 것이다. 바로 마귀는 자기가 하려는 일만 하는 집단이기 때문이다. 그런 염원을 성취해주는 것이 신앙이라고 잘못 생각하게 되면 예수 귀신의 힘으로 팔자 한 번 고쳐 보겠다는 인간의
하잘것 없는 염원일 뿐이다.
그렇다! 그리스도 신앙은 십자가에 돌아가신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들이라 고백한다. 삶과 죽음의 인간 현실 안에서 이웃을 보살피고 돌보시던 예수님의
섬김을 배우고, 예수님 당신 스스로를 내어주고 쏟아 십자가의 삶을 사셨던 예수님을 믿는 것이다. 그분이 사신 삶을 우리의 실천으로 배우는 것이 참 그리스도 신앙이다. 그것이
재물이든, 지위든, 자기 한 사람 잘 될 것을 약속하는 더러운
영이 물러나는 곳에, 예수님이 가르친 하느님의 생명을 사는 신앙의 길이 있다. 오늘 복음에 회당에 모인 사람들은 ‘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이라고 말한다. 하느님의 생명이 하시는 일을 실천하며 살아, 그분의 자녀 되게 하는 ‘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이라는 고백이며 참 사랑 그리고 참 섬김을 살려고 하는 이들이 보는 십자가의 삶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