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3월 19일 사순 제 4 주일 김두진(바오로)신부님 강론

 

319일 사순 제 4 주일

오래 전에 맹인선교회 피정을 지도 한 적이 있었다. 맹인들이 의자를 찾아 앉는 것이 쉽지 않아 의자를 치우고 바닥에 앉게 했다. 성가 한 곡 부르고 나니 눈이 보이지 않는 맹인들이라 소리나는 스피커 쪽인 네 방향으로 앉아있었다. 나는 마이크를 끄고 손뼉을 치면서 맹인들이 앞쪽을 향해 앉게 하고 이렇게 물었다. “하느님을 보셨습니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니라고 대답을 하는데 비해 맹인들은 모두가 네! 하고 대답했다. 나의 기대와는 다른 대답이 나오자 짓궂은 마음이 들어 이렇게 물었다. “아니 보지 못해 스피커 쪽으로 앉아있는 양반들이 어떻게 하느님을 봅니까?”그러자 맹인선교회장이 내게 이렇게 일갈했다. “우리 맹인들은 앞을 못 보기 때문에 물어보고, 만져 보고, 느껴봅니다해서 우리는 앞만 못 보지 세 번씩 봅니다.”

 

요한복음 9장 이야기 배경은 유다 축제 초막절이다. (7-8초막절은 이집트에서 해방된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불기둥과 구름을 안내자로 삼아 가나안으로 행진한 것을 기념한다이 시기에 많은 등불이 화려한 예루살렘 성전과 이스라엘 가정을 밝힌다사람들은 환한 등불을 보면서 주님이 빛 이자 안내자로서 광야를 통과하게 해 주신 것을 기억하는 것이다예수님은 성전에서 가르치며 “나는 세상의 빛이다나를 따르는 이는 어둠 속을 걷지 않고 생명의 빛을 얻을 것이다”(요한 8,12)라고 말씀하신다.

   

예수님은 성전 밖을 지나가다가 태어나면서부터 눈먼 사람을 보신다이름 없는 사람으로 소개되는 이유는 모든 시대모든 사람에게 적용되는 상징어이기에 그렇다. 세상의 빛이신 그분께서 이 눈먼 사람을 보시고,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게 하는 도구로 선택하신다.

 

예수님이 눈먼 이를 치유한 방식이 매우 흥미롭다.

예수님은 땅에 침을 뱉고 그것으로 진흙을 개어 눈먼 이의 눈에 바르시고 실로암 연못에 가서 씻으라고 하신다. 침은 유동적이면서도 내밀한 것으로 예수님의 침은 높은 곳에서 태어나게 하는 성령을 말한다진흙을 개는 행위는 흙으로 만들어진 인간 창조를 연상시키는데(창세 2,7) 여기에서는 새 인간창조와 연결된다이 행위가 눈을 뜨게 하고 보게 한다는 것이 본문에서 반복되는데 바리사이들에게는 안식일을 위반한 죄로 보이지만, 눈먼 이와 예수님께는 안식일의 참된 의미곧 새로운 창조가 된다또한 요한이 실로암의 뜻을 히브리어로 ‘파견된이라고 번역하는 이유는 눈먼 이가 치유된 것은 실로암 물 때문이 아니라 파견된 예수님 말씀을 경청하고 순종했기 때문임을 말하고 있다눈을 뜨게 된 사람은 환상과 상상막연한 두려움이 아니라 이제 자기의 눈으로 있는 그대로 보고 판단하게 된다그래서 그는 자신을 어둠에서 빛으로 구해낸 분의 이름을 예수님(주님이 구원하신다)이라 부른다.

 

  이웃과 지인들이 바리사이들에게 그 사람을 데려간다. 바리사이들은 “그가 당신 눈을 뜨게 해주었는데당신은 그를 어떻게 생각하오?”하고 묻는다눈먼 이로 태어나 율법을 읽을 수도 없고 생존을 위해 길바닥에서 구걸하며 평생 살아온 사람이 예수님에 대해 말할 수 있는 것은 자기 체험으로 일어난 사실 뿐이다. 소경으로 태어나 눈을 뜨게 된 사람을 구박하는 바리사이들의 질문은 장님에게 오히려 ‘나를 치유한 분이 정말로 누구이신 지를’ 심각하게 생각하게 한다. 어둠과 위기의 순간에 예수님께 대한 지식과 사랑이 서서히 깊어 진다는 말씀이다그래서 그는 예수님께 관해 연달아 질문을 받았을 때처음에는 예수님을 ‘예수라는 분 그리고는 예언자 또 하느님께서 보내신 분’이라고 하고 마지막에 예수님을 만났을 때에는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한다그는 오늘 제 2 독서에서 말하는 것처럼 ‘한때 어둠이었지만 지금은 주님 안에 있는 빛’(에페 5,8)으로서 어둠 속에 있는 사람을 빛으로 데려가는 주님의 제자가 될 것이다.

   

이와 반대로 유다인들은 소경이 보는 것을 못 보고 있다. 해서

정말 눈이 먼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통해 현존하시는 하느님을

보지 못하고 그분을 죄인으로 배척하고 있는 유다인 들이다그들이 눈이 먼 것은 그들이 빛을 피하여 어둠으로 숨어버렸기에 하느님께서는 단죄의 심판을 내리신다이 심판은 따지고 보면 하느님께서 내리시는 것이 아니라자기 자신들이 스스로 내리는 단죄의 심판이다. 그러므로 사람들의 구원이나 멸망은 그리스도를 생명의 빛으로 받아들이거나 거절하는가에 달려있다.

 

바리사이들은 부모를 불러서라도 예수님이 죄인이라는 자기들 생각을 입증하고 싶었지만 실패한다. 그러자 다시 소경이었던 사람을 불러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시오우리는 그자가 죄인임을 알고 있소.”하며 윽박지른다예수님이 죄인으로 드러나지 않으면 그들의 권위가 무너질까 두려웠기 때문이다율법을 배운 적이 없는 무식한 소경에게 하느님의 영광을 강요하는 그들은 자기들끼리 영광을 주고 받으며 (요한 5,44) 하느님에게서 받는 영광은 추구하지 않는 사람들임을 스스로 증명하고 만다.

   

자기 체험과 판단에 바탕을 두고 예수님을 용기 있게 증언한 사람은 그 대가로 회당에서 쫓겨나고 박해당하는 스승의 여정을 그대로 따르는 제자가 된다그는 예수님을 다시 만나 “주님저는 믿습니다.”라고 고백하고 경배 드린다그 사람의 단계적인 신앙 여정이 절정에 달하는 순간이다.

 

신앙은 자신이 체험한 분자신이 말하고 있는 분예수님 안에서 하느님을 보는 것이다. 오늘 복음을 통해 볼 것을 보지 못하고 들어야 할 것을 듣지 못하는 이들에게 주님은 너희가 눈먼 사람이었으면 오히려 죄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너희가 우리는 잘 본다 하고 있으니 너희 죄는 그대로 남아있다.”하신다. 보는가, 보지 못하는가, 아멘, 아멘!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