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26일 사순 제 5 주일
오늘 복음에는 예수님과 아주 가까운 관계를 가졌던 라자로와 마르타 그리고 마리아의 세 남매에 관한 이야기로 시작한다. 어느 날, 예수님께서 그 자매로부터 라자로가 병이 들어 위급하다는 소식을 전해 듣는다. 평소 같으면 당장 달려가 고쳐 주실 예수님께서는 왠지 그곳에 이틀이나 더 머무르시는 바람에 라자로는 죽게 된다. 그리고 라자로가 무덤에 묻힌 지 나흘이 지나서야 베타니아에 있는 그들의 집으로 가신다. 마르타는 주님께서 오신다는 말을 듣고 나가 “주님, 주님께서 여기에 계셨더라면 제 오빠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이라도 주님께서 구하시기만 하면 무엇이든지 하느님께서 다 이루어 주실 줄 압니다.”라고 말씀드린다.
예수님께서 오시지 않아 라자로가 죽은 절망적인 상황에서 마르타는 “지금이라도”라는 말로 곁에 계신 예수님께서 지금 무엇인가 해주시리라는 희망을 갖고 있었다. 이것은 모든 것이 끝난 상황이지만 주님께서 원하시면 지금이라도 당신의 일을 이루실 수 있고, 모든 상황을 역전시켜 주실 수 있는 분이라는 사실을 믿고 있음을 드러낸다. 예수님께서는 마르타의 고백을 들으시고 “네 오빠는 다시 살아날 것이다.”하고 말씀하시니 “마지막 날 부활 때에 오빠도 다시 살아나리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라 대답한다.
마르타는 조금 전 예수님을 만날 때 “지금”뭔가를 하실 분이라고 말했는데, “마지막 날 부활 때에”라는 말로 지금 여기서의 신앙고백 대신 현재 지금, 여기서 그 부활을 볼 것이라는 확신은 하지 못한다. 마르타는 정녕 부활을 믿으면서도 그 부활의 믿음이 지금 이 순간 현실화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믿음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에게 ‘앞으로 일어날’ 신앙이 아니라 ‘지금 여기서’ 일어나는 신앙을 갖기를 요구하신다. ‘먼 훗날 그렇게 해주시겠지’라는 막연한 믿음이 아니라 ‘지금, 여기서’ 하느님의 일과 영광이 드러나고 있음을 받아들이는 확신의 믿음을 원하신다.
자매를 데리고 무덤에 이르신 예수님께서 돌을 치워라 하시며 다시 한 번 그들의 믿음을 요구하신다. 그러나 마르타는 예수님의 뜻도 모른 채 “주님, 죽은 지 나흘이나 되어 벌써 냄새가 납니다.”라며 현재의 절망적인 상황만 바라보는 나약한 믿음을 드러내 보인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네가 믿으면 하느님의 영광을 보리라고 내가 말하지 않았느냐?”라고 질책하시며, 현재 상황만을 보면 절망적일 수밖에 없지만, 하느님을 보면 어떠한 기적도 이루어 낼 수 있음을 깨닫게 해주신다. “라자로야, 이리 나와라!”죽은 지 사흘이나 지난 라자로를 살리신 주님의 능력은 사랑이다.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의 사랑이다.
우리와 함께 영원히 살고 싶으신 하느님의 마음이 예수님의 외침으로 온 세상을 적셨던 그날처럼 주님께서는 오늘 죽은 지 사흘이나 지나서 냄새가 나는 우리의 이름을 부르신다. 바로 나에게 새 생명을 불어넣어 주시려 목청을 다해 외치고 계신다. 생명이 아닌 것으로 치장하느라 지친 내 이름이 바로 라자로이며, 죄 때문에 죽어가는 우리 모두가 라자로다. 우리의 삶이 죄 때문에 썩어 문드러졌다 해도 괜찮다. 삶에 갖은 악취가 진동을 한다 해도 상관없다. 나자로의 죽은 몸이 수의에 쌓여 묶여 있는 것처럼 악으로 손발이 묶여 꼼짝할 수 없어도 무관하다. 그분의 음성에 깨어나면, 주님의 부르심에 일어설 수 있으면 되는 일이다. 그분의 치유를 믿고 이 모습 이대로 나아가는 결단만 있으면 된다.
세상에서 죽기 위해서 태어난 사람은 아무도 없다지만, 예수님은 세상에 죽기 위해 태어나셨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살리기 위해서 이 세상에서 죽기 위해서 오신 유일한 하느님의 아들이시다. 자신의 죽음을 작정하고 세상에 왔던 유일한 분이 예수님 이시니 예수님은 우리의 과거에 연연하지 않으신다. 그래서 염치없는 우리지만 하느님의 부르심에 일어설 수 있다. 인류역사 안에서 인간의 악랄한 본능이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난 사건은 바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일이다. 그런데 그 극심한 악이 저질러진 배경을 살피면 어이가 없다.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 죄 없는 분을 성난 군중에게 내어주었던 그 무섭고 끔찍한 인간의 책략에 할 말이 없다. 달랑 손 한번 씻으며 책임을 벗으려던 빌라도의 가벼움에 분노가 일고, 예수님의 고통에서 볼거리를 원했던 헤로데의 음흉함에 소름이 돋는다. 물론 예수님의 얼굴에 침을 뱉으며 모욕했던 병사들의 무지도, 골고타로 향하는 주님께 가혹한 채찍을 휘둘렀던 군인들의 잔인함도, 덩달아 고함을 질러 대며 합류했던 군중들까지 예수님의 고통을 즐기고 있었다는 사실에 아연실색하게 된다. 스승님의 고통을 외면한 채 도망치기에 급급했던 제자들 어이없다. 그런데 이런 일들은 지금 우리에게서 흔히 일어나는 것들이다. 세상의 고통이 나와 무관하다는 것에 안위 하며 힘없는 이웃을 외면한 채 몸을 사리는 경우도 비일비재하고, 자신의 영향력을 키우려고 전전긍긍하는 모습과 홀로 정의를 살아내는 양 이웃을 판단하는 모양새도 너무 익숙한 우리의 일상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모자란 우리이기에 사순의 은총이 절실하다. 우리의 미 많은 죄는 오로지 십자가의 피로만 씻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세상은 주님의 은총을 믿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한다. 하느님의 방법이 너무 쉽고 간단해서 받아들이지 못하고 의아해하며 의심한다. 이런 의심에는 통 큰 하느님 사랑을 선뜻 받아들여 믿지 않는 것이 곧 죄라는 사실을 모르기 때문이다. 사순 시기는 죄와 맞서는 능력을 얻는 복된 시기이다. 그러기에 사순 시기는 신앙의 큰 기쁨과 벅찬 감격이 따른다. 예수님은 오늘 큰소리로 죄의 죽음에 있는 우리를 부르신다. “라자로야 이리 나와라!”